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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방송제도개혁,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조 2항)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 문구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권력의 주인이 권력을 행사하려면 올바른 정보와 견해에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대다수 언론은 그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그 중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언론 중 하나가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이 지난 정권의 방송장악 과정에서 부역했던 인사들을 몰아내고 공영방송 바로 세우기에 나선 것도 그런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9년 동안 공영방송들은 권력의 홍보방송으로 전락해 신뢰성과 영향력이 함께 추락했다. 이제 자율성을 회복한 공영방송의 구성원들이 좋은 뉴스나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보는 사람이 적은 현실이 됐다. 영향력이 추락하니 공영방송이나 지상파를 향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지상파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있었지만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세인의 관심도 적어 보인다. 지난 3일 지상파 사용자들과 산별노조인 언론노조가 처음으로 산별협약을 맺고 내용을 공표했다. 여러 내용이 있지만, 핵심은 공정방송 조항과 제작환경 개선 조항이다.

 

헌법이나 방송법의 관련 조항을 원용한 법원의 기존 판결처럼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방송 노동의 기본조건이다. 하지만 경영진에 따라서 이 기본조건이 유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개별 회사 차원을 넘어 지상파 4사가 언론노조와 맺은 산별협약에 공정방송 조항을 포함한 것은 방송의 공정성을 실천하겠다는 노사, 즉 전체 방송구성원들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공정방송 조항은 노사 모두 공정방송을 실현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편성 보도 책임자의 임명과 평가에 제작종사자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했다. 또 공정방송을 보장할 수 있도록 노사 동수의 공정방송기구를 운영할 것도 규정했다. 이미 법적 구속력을 갖는 개별 회사 차원의 단체협약이 있지만, 과거 MBC 사례에서 보듯 무도한 경영진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 산별협약은 개별 회사의 경영진과 노조의 힘의 균형이 변함에 따라 변질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공정방송 장치라 할 것이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제작환경 개선 조항이다. 최근 진행되는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해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도 포함했지만, 무엇보다 사내외 비정규노동자의 노동 현실을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있다. 고 이한빛 PD를 비롯해 장시간 노동의 희생자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는 ‘장시간 제작 분야 특별대책’ 조항은 “드라마 제작 시 사전에 방송사 책임자, 제작사 대표는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촬영현장 스태프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 그 노동조합)와 촬영 시간, 휴게 시간, 식사 시간, 휴차 등 제작환경에 대해 충분히 협의하여 제작현장을 운용”하도록 함으로써 선언만이 아니라 실질적 보장을 추구했다. 더 나아가 현실적 방책마련을 위해 연내 ‘고용구조 실태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언론들에 비해 공공적 의무가 더 큰 공영방송을 비롯한 지상파들이 공공성 실현의 중요한 조건들을 합의하고 실천하려 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현실이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별 회사 내의 단체협약보다는 산별협약의 경우 압박이 더 클 수는 있겠지만 그 준수가 실제 이뤄질지 여부는 여전히 경영진의 성향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공정방송 장치를 단체협약보다는 법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공정방송 의지가 있는 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지금처럼 공영방송의 이사 임명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을 법으로 완전히 금지시킬 필요도 있다. 제작환경 개선도 사용자의 의지만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제작환경의 개선은 물적자원, 즉 재원을 필요로 한다. 영향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적자 수지를 보이는 지상파로서는 실천하기 버거운 과제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제작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의지를 보인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비대칭 규제로 여타 경쟁언론들, 특히 종편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 있는 현실이 해결되지 않고 실천 가능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공공적 의무를 더 지는 언론이 시장에서는 오히려 불리한 경쟁조건을 감수해야만 하는 현실은 개선돼야만 한다. 물론 그 방향이 지상파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지원을 강화할지, 아니면 경쟁 매체들 역시 공공적 가치에 맞게 규제를 강화할 것일지 여부는 신중한 논의를 전제한다.

 

법과 제도로 해결해야만 하는 중대한 과제들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제 정부나 국회 등 정책 당국, 방송관계자 그리고 전문가들이 모여 민주주의 제도에 맞는 방송의 가치를 실현할 제도를 논의할 사회적 기구가 필요하다. 정책 당국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김서중 |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