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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공감]허위정보와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는 이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모든 논의들을 블랙홀처럼 집어삼키는 양상이…. 국정감사 기간 쏟아져 나온 현안들에, 폭로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은 “근거가 잘못됐다”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 “가짜뉴스다”라고 받아쳤다. 정치적 공방을 벌여야 할 사안에 “가짜뉴스다”라는 말 한마디로 “토론 끝”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가짜’가 제대로 가려졌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대신 ‘뉴스’가 망가지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맞지 않는 보도에 대해 ‘가짜뉴스’라는 딱지를 붙이던 편향성이 이제는 더 스스럼없고 공공연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언론신뢰도가 낮은 터에 기자들이 애써 검증한 사실마저 ‘가짜뉴스’로 낙인찍힐 수 있다면, 언론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그 대가는 허위정보를 검증해야 할 모든 기관들을 다 ‘가짜뉴스’의 출처로 몰아갈 수 있게 만든 사회가 지게 된다. 저마다 자기주장을 사실로 강변하는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2017년 한 해 인도에서는 최소한 8명이 허위정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7명은 아이를 유괴했다는 헛소문으로, 한 명은 힌두교가 신성시하는 소를 먹었다는 거짓정보로 성난 군중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이 허위정보가 퍼져나간 경로는 왓츠앱(WhatsApp)이라는, 인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바일 메시지 앱이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허위정보를 다 틀어막아야 하지 않느냐고 서두르기 전에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는 종교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적대 지수(Social Hostilities Index)가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은 나라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허위정보가 폭력으로 불붙을 수 있었던 원인은 허위정보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적 적대이지, 왓츠앱이 아니란 얘기다. 

 

이웃 일본은 상대적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는 허위정보에 대한 걱정을 덜 하는 나라다. 쇼비니즘, 혐한(嫌韓)을 노골적으로 전파하는 사이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언론매체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증오 사이트들의 허위 주장을 퍼담아 옮기는 사람이 적다. 일본 공영방송인 NHK는 2016년 6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500일 동안 온라인 공간에서 타인을 공격한 1100여개의 사례를 추적해 그중 정도가 심했던 420건을 분석했다. 허위정보에 기반한 공격도 있었는데, 분석 결과 공격 대상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허위정보와 그 공격성을 방치했을 때 희생자는 바로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장기간의 탐사보도를 통해 정보 수용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가짜뉴스’와의 속도전을 선언한 한국 정부의 눈으로 보자면 유럽연합(EU)이 허위정보에 대처하는 방식은 한가해보이기 짝이 없을 것이다. EU집행위원회는 법적 규제가 가능한지를 검토하기 위해 학계, 언론계, 팩트체커, 시민사회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39명의 인사로 고위급 전문가 그룹을 꾸려서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시민부터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까지 참여할 수 있는 광범위한 온라인 자문을 벌였고, EU 구성국 28개국에서 허위정보의 실태를 알아보는 공통 양식의 조사를 진행했다. 고위급 전문가그룹이 몇 개월의 숙의 끝에 지난 3월 내놓은 보고서의 결론은 법안 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한 해결책은 무시하라”고 조언했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협력할 때에 비로소 허위정보가 표현의 자유와 언론 자유, 다원주의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짜뉴스’ 규제 관련 법안이 여야를 통틀어 22개나 발의됐고, 정부가 나서서 ‘가짜뉴스’를 뿌리 뽑겠다고 하는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조사나 논의가 선행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허위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하루이틀에 그칠 일이 아니라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성급하게 ‘가짜뉴스’에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도, 허위정보와의 싸움도 한판승이 아니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