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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김종목의 미디어잡설

‘기업형 조폭’과 ‘조폭형 기업인’

*이 글은 <주간경향>에 연재중인 [정동늬우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메신저 등을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인터넷 언론사에 허위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작성·배포하는 수법으로 주가를 조작해 수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조직폭력배 등이 검찰에 적발됐다.(2011년 2월 2일자, 고등학생 낀 조폭 주가조작단)

‘맷값 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물류업체 M&M의 전 대표 최철원씨(41)가 2010년 12월 2일 서울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기업형 조폭(조직폭력배)’.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도래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물린 변화의 결과물. 납치·폭행·마약밀매 등이 주특기이고 돈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던 조폭들이 기업·금융 사기에 뛰어들며 ‘기업형 조폭’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들은 악덕 기업인들의 흉내를 곧잘 내곤 했다. 그러니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이 아니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이란 있어 보이는 화이트 칼라 범죄에 조폭 명단이 등장.

수원지검 여주지청은 7일 조직폭력배들과 짜고 수십억원을 불법대출해 준 뒤 사례비를 받은 경기 이천시 농협 ㅇ지점 전 지점장 이모씨와 전 과장 최모씨 등 3명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또 이들로부터 불법대출을 받거나 대출을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챙긴 이천지역 폭력조직 ‘새생활파’ 행동대장 안모씨 등 4명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1999년 4월 8일자, 조폭에 수십억 불법대출 농협 전 지점장 등 셋 구속)

당시 경향신문 ‘여적’은 조폭 행동양식의 시대적 변천사를 이렇게 정리.

서울의 명동을 신상사파가 장악했던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맨몸의 ‘주먹’이 좌우했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생선회칼 등 흉기가 이들을 몰아낸 뒤부터 조폭계의 풍토는 잔인해졌다. 그러던 것이 나라의 경제규모와 함께 기업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돈이라면 어디라도 가고 누구와도 결탁하는 것이 이들의 생리다.(2000년 12월 19일자, 기업형 조폭)

2003년 ‘여적’도 “(조폭들은) 6개월 단위로 아파트 재건축·사금융업 등 이권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특징을 보였다고 한다. 바퀴벌레 수준의 유연성이다. 바야흐로 조폭에게도 ‘포스트 모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라며 기업형 조폭을 진단했다. 토건국가의 조폭답다. 이 ‘포스트 모던’ 한 조폭들의 소득 수준은 상당한 편이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국내 폭력조직 범죄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29일 내놓은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조폭은 유흥업소 등 평균 3.9개 분야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조직원의 월수입은 평균 4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행동대장·부두목·두목 등 ‘간부’급은 작게는 30평대에서 크게는 50∼60평대 아파트에서 자가생활을 하며, 상당수가 취미로 골프를 즐기는 것으로 밝혀졌다.(2007년 1월 30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 - ‘조폭들 잘나간다’)

‘사회적 지위’가 오르다 보니, 가끔은 판사님과 즐거운 골프 라운딩까지.

대법원은 8일 “전주지법 정읍지원 소속판사가 2001∼2004년 과거 폭력조직의 일원이었던 인테리어 업자와 함께 제주도로 골프 여행을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2007년 2월 9일자, 이번엔 판사, 조폭 출신 기업가에 골프접대 받아)

2010년에는 합법을 가장한 M&A 조폭들도 등장할 정도.

                                  김용민 그림마당 <경향신문 2010년 11월 30일자>


자본 없이 빌린 돈으로 코스닥 상장업체를 인수한 뒤 회삿돈을 횡령한 조직폭력배들이 검찰에 적발됐다. 이들은 ‘기업 사냥꾼’들의 전형적인 불법 인수·합병에 폭력을 결합시키는 수법으로 ‘진화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2010년 6월 7일자, 진화하는 조폭)

‘기업형 조폭’의 등장과 진화의 과정 속에 조폭과 불량·악덕 기업(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애초 조폭은 보도자료를 쓰고, M&A를 하느라 머리를 굴리는 족속이 아니었다. 악덕·불량 기업인도 주가를 조작하고 폭력을 사주해도 귀하신 몸을 굴려 폭력을 휘두르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다. ‘맷값 폭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물류업체 M&M 전 대표 최철원씨는 경계를 허문 인물.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야구선수와 조폭. 재벌 인사들도 추가해야 할 판. 너무도 강렬한 폭력의 오브제 야구방망이.
재판부는 “피해자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요청하는데도 돈을 빌미로 심한 폭력을 행사해 모멸감을 줬다”며 “사회에서의 우월적 지위와 다수의 힘을 빌려 사적인 보복을 한 점이 인정돼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10월 유씨가 SK 본사 앞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자 야구방망이로 10여 차례 구타한 뒤 2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됐다.(2011년 2월 9일자, 해고 직원 ‘맷값 폭행’ 최철원 ‘실형’)

‘기업형 조폭’과 ‘조폭형 기업인’의 조우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 <조폭마누라> 등 조폭 영화 신드롬이 불던 2000년대 초반 이용호 게이트에서도 조폭이 등장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G&G그룹 회장 ‘이용호 게이트’에서도 조폭 출신의 사업가가 등장했다. 그는 내로라하는 정·관계 실력자들과 친분을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터진 ‘정현준 게이트’에서도 기업가로 변신한 조폭 출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웬만한 대형 경제사건에는 여지없이 그들의 이름이 들어 있어 조폭들의 활동이 기업이라는 이름의 베일 속으로 숨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2001년 10월 16일자, 집중취재. 조폭신드롬 ‘영화 밖’서 판친다)

재벌들의 폭력과 횡령, 비자금 사건에 관한 경향신문 경제부 서의동 차장의 ‘마감후’ 칼럼.

올라가려 해도 사다리가 없는 사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사업 기회를 빼앗는 재벌들을 수수방관하는 정부 하에서 서민들은 꿈을 잃었다. 사회가 호락호락해지자 재벌들의 의식수준은 봉건시대로 돌아갔다. 국내 재벌들에게 프로테스탄트적인 ‘청부(淸富)’ 윤리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깨끗하게 벌진 못했어도 정승같이 쓰겠다’는 의식도 갈수록 찾아보기 어렵다.(중략) 수조원대 비자금 사건으로 기소됐던 재벌 총수가 사면받은 뒤 “우리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그냥 꾹 참아야 한다. 그는 황제니까. (2010년 12월 2일자, 그가 야구배트를 들게 된 사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한국 사회는 재벌과 재벌의 죄를 미워해선 안 되는 사회가 되었다.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