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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가진것 없어도 산에 살아 행복했는데, 이젠 늙었어…”

· 지리산 피아골 38년 산장지기 접는 함태식옹

모아 둔 돈이 좀 있느냐고 물어봤다.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 관리인 함태식 선생(82)은 “통장에 10만원쯤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함 선생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사상 최초이자 최장수 산장지기다. 1972년 45세의 나이로 지리산 노고산장의 관리를 맡은 이후 지난 38년간 지리산을 떠난 적이 없다. 지리산이 그의 집이었다. 먹고 입고 자는 일이 모두 산 위에서 이뤄지니 산 아래에 재산을 쌓아놓을 이유가 없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산에 살아 행복한 산장지기. 함 선생을 여러 해 알아온 산꾼들은 산장지기가 그의 ‘평생직업’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4월 말이면 함 선생은 지리산을 내려와야 한다. 그간 함 선생과 수의계약을 맺고 대피소 관리를 위탁했던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올해부터는 경쟁입찰제도를 도입, 제3자에게 운영권을 넘겼기 때문이다. 관리공단 관계자는 “함 선생이 연세가 많으신데다, 대피소 관리를 함 선생이 독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민원이 2006년부터 있었다”고 했다.

지난달 25일 피아골 대피소에서 하산을 앞둔 함 선생을 만났다. 그는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최근까지도 산비탈의 빈집들을 보러 다녔다. 뒤늦게 관리공단 측이 살림집을 제공하겠다고 나서면서 겨우 집 걱정을 덜었다고 했다.

“늙었으니 하산하라고 해서 4월 말에 나가기로 했어요. 날짜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고. 그간 국립공원에서 대피소 관리인을 선정할 때 경쟁입찰을 하지 않고 나 혼자 수의계약을 해서 38년 동안 살았다고. 보통 1월2~3일이면 수의계약을 새로 해요. 그런데 지난해 말에 ‘내년에는 경쟁입찰을 할 거니까 산장을 내줘야겠다’고 하더라고. 인터넷으로 경쟁입찰을 한 거야. 보니까 새로 대피소에 들어올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입찰을 포기했어. 내가 내려간다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인사하러 많이 와요. 매스컴에서 보고 전화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난 2월28일엔 산장 식구들이 하산 잔치도 열어줬어요.”

-이사갈 집은 구하셨습니까.

“산 생활을 38년 하니까 도시생활은 못해요. 마흔여덟 먹은 아들놈이 인천에 사는데 그 집에 가서 하루 자면 다음날 눈이 빨개져. 내 몸이 공해 테스터야(웃음). 담배 냄새도 아주 싫어해요. 산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제일 문제지만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야. 구례 시내에만 나가도 답답해.

그래서 지리산 산비탈에 있는 빈집을 알아봤어요. 많지는 않아도 빈집이 있으니까. 여러 군데 돌아다녀봤지. 그런데 빈집을 수리해서 조립식 집을 짓고, 채소를 가꿀 만한 땅까지 사려면 최소한 3000만~5000만원이 들어. 마음에 드는 집도 없었고. 여기 야영장 옆에 국립공원 피아골 분소가 있어요. 사무실이 있고 그 옆에 살림집이 있기에 그거라도 내가 좀 쓰자고 그랬거든. 처음엔 국립공원 측에서 내가 거기에 살면 직원들이 불편해서 안된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꿔서 내가 거기에서 살 수 있게 리모델링을 해준다고 하더라고. 4월 말쯤 공사가 끝나면 내려갈 거야.”

-하산해야 한다고 하니 가족들은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아들이 둘 있고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은 수녀라서 로마에 가 있어요. 파이프 오르간으로 독일에서 4년 연수를 받아서 연주자 자격증도 있지. 4월 말에 휴가를 얻어서 온다고 하니까 오랜만에 보게 됐어. 아들들은 내 성질 아니까 아무 소리도 안 해요.”

-지난 세월 산장지기로 사느라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이제 가족과 같이 사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 성질이 며느리한테 밥 얻어먹을 성질이 아니야. 그놈들이야 편하지, 뭐. 내가 지금 ‘너희 집에서 살자’ 하면 저희들이 얼마나 귀찮겠어. 며느리가 한 끼만 대접해도 내가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데.”

-40여년을 살아온 지리산을 떠나야 하는데 아쉽고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섭섭하지도 않아. 나이가 있으니까. 사실 산에 사는 건 무리야. 다니는 게 쉽지 않아. 오늘 여기까지 걸어보니까 힘들지? 경치가 좋으니까 한 번은 다녀갈 수 있는데 여기에서 살면서 아침에 내려가서 일 보고 오려면 힘들어요. 요 며칠 집을 본다고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코 밑에 뭐가 났잖아. 늙었으니 내려가야지. 팔십 넘어서 혼자 산다는 게 참 힘들어. 텔레비전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들여다보고 있는데 스카이라이프가 고장 나면 그것도 못 보잖아.”


제1호 국립공원의 제1호 산장지기

지리산의 기운 덕분일까.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고 했지만 함 선생의 총기는 청년 같았다. 지난날 산장에서 생활하며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회상할 때 날짜와 등산객의 이름, 직업 등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십니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건강해요. 담배도 일찌감치 끊었고. 내가 젊었을 때는 담배를 무지하게 피웠어요. 필립모리스를 하루에 3갑 피우다 시원치 않으니까 파이프를 할 정도였거든.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다 ‘공화당 망할 때까지 담배 끊겠다’고 하고 안 피웠지. 나중엔 ‘박정희 죽을 때까지 피우지 않겠다’로 바뀌었고. 내가 노고단에 있을 때 박정희가 죽었어요. 그때 천은사 주지가 반체제 골수분자였어. 박정희 죽은 후에 암자에 갔더니 그 양반이 벽장을 열고 담배 한 갑을 꺼내더라고. 박정희가 죽으니까 신이 나서 담배를 사놓은 거야. 나 오면 주려고(웃음). 그런데 끊어보니까 좋더라고. 그래서 아주 끊었지.

그래도 병원엔 종종 가요. 전립선암이 있거든. 전립선암을 발견한 게 2003년인데 술 덕분에 알았어요. 당시엔 술에 취해서 자리에 누우면 며칠씩 밥을 안 먹었어요. 산장에 드나드는 산꾼들이 겁이 나니까 나를 데리고 내려가서 구례병원에 입원을 시킨 거야. 링거 맞으면서 며칠 누워 있다가 탈장 증상이 나타나서 수술을 받았어요. 늙어서 무거운 짐을 들고 산을 오르내리니까 창자가 밀린 거지. 그런데 수술한 이튿날 소변을 보는 도중에 피가 두 방울 떨어지더라고. 의사가 광주의 큰 병원으로 가라는 거야. 전립선암인 거야. 그게 76세 때예요. 지금은 괜찮아요. 조금 남은 것이 있으니까 약은 먹어.”

-88년 1월 피아골 대피소로 옮기기 전까지 노고산장을 관리하셨습니다. 고성방가하는 등산객들을 엄하게 다뤄서 별명이 ‘노고단 호랑이’였는데.

“내가 호랑이 소리를 들으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주먹 덕분이에요. 45년에 우리나라 첫 권투시합도 뛰었지(웃음). 그래도 사람 한 번 때려보지 않았고 맞아본 적도 없어. 그땐 ‘조용히 깨끗이 불조심’이라는 산장 수칙을 걸어놓고 밤 10시면 불 딱 끄고 등산객들 자게 했어. 산은 아무리 장사라도 잠을 안 자면 못 타거든. 조용하려면 노래해선 안되잖아. 옛날에는 기타와 카세트 플레이어를 다 짊어지고 산에 왔어요. 필수품이야. 그것을 없애려고 국립공원 측과 상의해서 매표소에서 기타와 카세트 플레이어를 압수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놈들이 노고단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기타 치고 노래하면서 밤을 새우는 거야. 그럼 아수라장이 돼서 잠을 못 자요. 못하게 막느라고 싸움 많이 했지.
 

여기 피아골 대피소에도 써붙여 놓았잖아.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 지금이야 기타 들고 오는 사람들 없지. 그래도 단풍철에는 관광버스 타고 와서 떠드는 놈들이 있어요. 낫살이나 먹은 놈들이 술 퍼마시고 노래하더라고. 그래서 한 번 싸웠어. 산에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러 오는 거잖아.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들어야지. 노래 들으려면 무엇하러 산에 오느냐는 말이야. 피아골 물소리가 참 좋아. 이번에 그렇게 가물 때도 피아골엔 물소리가 있었어요. 소(沼)가 많으니까. 폭포도 작고 예쁜 게 많지.”


“죽기전에 만날사람도 있고, 돌아다닐거야”

-지리산에서 ‘최초’라는 이름으로 이룬 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시조나 다름없어요. 우종수 선생이 지리산악회 회장을 하고 내가 부회장 할 때 국립공원 지정 운동을 한 거야. 그래서 67년에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가 됐지. 노고단에 산장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산장 유치 운동도 했어요. 노고산장이 생긴 후 전국에 산장 35개가 새로 생겼지.”

-사람 목숨도 여럿 구하셨다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하신다면.

“노고단에서 인명을 구조한 일이 많았지. 부지기수야. 그때 내가 ‘산동’이라는 진돗개를 키웠는데 그 녀석이 조난당한 사람들을 데려와요. 사람은 못 맡고 못 듣는 냄새와 소리도 개는 알거든. 노고단에서 피아골로 이사 왔을 때 산동이란 놈이 열살이었는데 그해 겨울이던가. 고등학생 5명이 계곡에서 덜덜 떨고 있는 것을 산동이가 데리고 왔어요. 이놈들이 산을 내려오다가 길을 잃어 계곡으로 간 거야. 가다보니 길이 없거든. 오도가도 못하고 랜턴도 없이 깜깜한 데서 떨고 있었던 거지. 가만히 있었으면 죽었을 텐데 개를 따라와서 살았어요. 숨넘어가기 전에만 오면 내가 다 살려요.

저체온증이라고 하지? 체온이 떨어지면 여름에도 동사로 죽어요. 밤차 타고 와서 산에서 밤새도록 술 마시고 하산하는데, 내려가는 길에 졸려. 잠깐 앉아 있다 보면 깜빡 잠이 들거든. 그때 비가 오면 체온이 뚝 떨어져. 그럼 앉아서 죽어요. 요새는 그런 사람들이 없지만 그땐 많았어요. 그 고등학생 중에 한 놈 아버지가 한 10년 후에 와서 고맙다고 하더라고. 나는 살려주면 그만이지 이름도 안 적어놨어.

피아골로 온 지 한 7~8년 됐을 때던가. 대전에서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인데 1월 초에 오전 8시쯤 대피소에 왔어요. 그런데 얼음 덩어리야. 사람이 아니라 아이스우먼이야. 신발과 배낭이 다 얼어 있어. 혼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더라고. 때마침 등산객 4명이 왔어. 사람 하나 살리자면서 도움을 청했지. 한 사람이 이쪽 신발, 다른 사람이 저쪽 신발, 신발 하나 벗기는 데 10분이 걸려. 겨울이니까 내 방이 군불을 때서 뜨뜻하거든. 내 옷을 내준 다음, 옷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어. 소주 한 잔 먹이고 재웠는데 잠시 후에 코 고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살아난 거지(웃음). 나를 도와서 여학생 살린 등산객 4명이 하산할 적에 그 여학생도 같이 보냈어요. 구례역에서 대전 가는 기차에 태워보내라고. 그래서 무사히 갔는데, 아주 싱거운 여자야. 소식도 없어. 다음해인가 어머니와 외삼촌이 찾아와서 인사하더라고. 본인은 지금까지 안 나타나고(웃음). 시집갔겠지.”


반평생 보낸 지리산을 뒤로하고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로 만든 함 선생은 지리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지리산의 등산로를 정비하기도 했다. 지리산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피아골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조차 그에게 밥을 얻어먹는다. 이날도 그는 까마귀밥으로 생라면을 내놓았다. 까마귀에게 주려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을 따로 챙겨놓은 것이다.

“노고단에 있을 때부터 30년 이상 까마귀를 먹여 살렸어요. 까마귀들이 밥 때 되면 꼭 와요. 내 소리를 알아서 내가 부르면 오는 거야. 까마귀도 세대교체가 돼서 나를 알아보는 놈들도 있고 몰라보는 놈들도 있어요(웃음). 이제 내가 내려가면 이놈들도 밥은 다 얻어먹었지.”

정든 것들을 뒤로하고 등 떠밀리다시피 하산해야 하는 마음이 편안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섭섭하지 않다고 말했다. 산을 내려가면 그동안 산장에 매여 있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을 실컷 할 계획이다.

“요즘은 커피 한 잔도 산장에서 사서 마시지 않아요. 보온통에 담아오지. 그러니까 나나 여기서 사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못 살아요. 오늘도 여러분이 처음이야. 오는 길에 사람 못 봤죠? 주말엔 등산객들이 조금 있긴 하지만. 산장에서 혼자 사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에요. 나는 보통 오전 6~7시에 일어나요. 저녁엔 텔레비전을 보다가 11시에 자고. 그나마 그것도 전기가 들어오니까 가능한 일이지. 피아골에서 전기 맛을 본 게 3년밖에 안됐어요. 피아골 대피소가 휴대폰이 잘 안돼서 불편이 많았어요. 휴대폰이 안 터진다고 항의했더니 이동통신 3사가 합동으로 200m 밖 능선에 기지국을 세웠어. 그전까지는 태양열 전지판을 쓰다가 그때부터 전기를 끌어다 쓴 거지. 기지국에서 선 하나만 끌어오면 되니까. 전기가 들어오면서 냉장고도 들여놓았어. 냉장고는 산꾼 한 사람이 짊어지고 왔어요. 덩치가 냉장고 절반도 안되는 조그만 놈인데 힘이 장사야(웃음). 냉장고가 있으니 많이 도움되지. 그 전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 보관을 못했어요. 겨울엔 눈에 묻어놓고 여름엔 물이 차니까 김치 같은 건 물에 담가놓지. 산장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소가 하나 있고 예쁜 폭포가 있어요. 거기에 호스를 담가서 물을 끌어오는 거야. 이 물로 세수하고 취사장에서도 써요.”

-노고산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전기가 없었습니까.

“노고산장도 처음 10년은 등불 켜고 살았어요. 등불을 켜놓고 책을 보면 완전 연소가 안돼서 골치가 아파. 그래서 연기가 빠지게 문 옆에 구멍을 뚫고 방충망을 친 다음 그 밑에 등잔불을 걸어놔요.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산꾼 중에 전기 전문가가 하나 있었어. 그 사람이 배터리를 들고 와서 형광등 하나를 켜주더라고. 배터리 충전을 하려면 노고단 정상에 있는 군부대까지 10~20㎞를 걸어야 했어요. 충전을 아마 24시간 이상 했지. 충전한 배터리를 짊어지고 오다가 눈 위에 미끄러져 뒹구는 바람에 배터리를 깬 적도 있어. 별일이 다 있었지. 그렇게 살았어요.”

-식사도 손수 만들어서 드시겠지요.

“밥은 내가 다 해먹지. 대개 된장국에 김치 놓고 먹어요. 저기 화분에 심은 대파 보이지? 작년 겨울에 심은 건데 지금 막 자라네. 추우니까 맥을 못 추다가 날이 풀리니까 확 피는 거야. 아껴 먹어야 하니까 하나씩 잘라먹어요. 계란도 하나씩 먹고. 된장, 김치 같은 건 우리 ‘똘마니’들이 더러 갖다 줘요.

산장에 오래 있으니까 날 따르는 식구가 많이 있지. 가까운 애들이 몇 있어요. 제일 젊은 놈들이 40대들이고 30대도 있긴 있고. 산에 오기 전에 전화 걸어서 ‘내가 언제언제 가는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봐요. 술도 많이 가져와. 내가 술 좋아하는 것을 아니까(웃음). 76세까지만 해도 내가 술을 주는 대로 먹었어. 서울에서 여기까지 술 짊어지고 와서 먹으라고 하는데 안 먹을 수 있어요? 젊을 때는 궤짝으로 마셔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소주 1병이면 딱 좋아. 반주로 마셔요. 반찬이 없으니까 술이 반찬이지. 밥 먹을 때 두 숟가락 먹고 소주잔 하나를 3번에 나눠 마셔요. 그래서 여섯 숟가락에 소주 1잔, 열두 숟가락 먹으니까 2잔. 두 잔 이상을 마시는 법이 없어.”

-그간 산장에서 혼자 지내는 게 적적하셨을 것 같은데.

“적적하진 않아요. 난 적적한 건 몰라. 시간은 잘 가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개고 청소하고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방에 앉아 있다가도 등산객이 오면 다 알아요. 발소리가 다 들려. 귀나 눈, 코는 전부 이팔청춘이야. 백내장 수술을 하긴 했지만 시력도 양쪽 모두 1.2이고. 혼자서 밥 해먹고 텔레비전 보고 등산객 오면 밖에 나가서 얘기도 좀 하고. 지금도 여든두 살치고는 짱짱하잖아. 여든두 살이면 대개 비실비실하고 다 죽지. 보통학교 친구들도 다 죽고 몇 없어. 팔십까지 살면 오래 산 거야.”

-산을 내려가면 무슨 일을 하실 계획입니까.

“전화번호부터 바꾸려고. 귀찮아. 친한 사람들한테야 연락하겠지만. 일단 금년 1년은 ‘국립공원 지킴이’란 게 있어요. 1년간 지킴이를 하면 한 달에 100만원을 준대요. 지킴이는 등산객들 등산 도와주고 자연보호를 하도록 훈련시키는 거야. 등산 온 사람들과 얘기나 좀 하면 돼. 산장에 있을 땐 집을 지켜야 했거든. 그래서 꼼짝 못했는데 이제 내려가면 자유야. 돌아다닐 거야. 외국은 돈이 많이 드니까 안되고 국내를 돌아다녀야지. 등산도 다니고 꼭 보고 싶은 친구들도 찾아다니고. 죽기 전에 한 번씩 만나야 할 사람들 만나고. 팔십이 넘었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 난 죽음이란 건 벌써 초월한 사람이야. 죽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요.”

▲함태식은 누구인가
산악회 활동하다 72년 노고산장 관리 자원
‘지리산 털보’ ‘노고단 호랑이’ 별명

‘지리산 털보’ ‘노고단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 관리인 함태식 선생은 1928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엔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지리산이 그리워 60년 4·19 민주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구례로 돌아갔다.

구례에 정착한 뒤 산악인 모임 ‘연하반’에 참여, 지리산 등산로를 정비하는 등 산악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연하반이 ‘지리산악회’로 거듭난 뒤 부회장을 맡았으며, 산악회 회원들과 국립공원 지정 운동을 펼쳐 67년 지리산이 한국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노고단에 산장을 세우는 데도 앞장섰다. 초기 노고산장은 산장지기 없이 운영됐는데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로 산장이 망가지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줬다. 그는 72년 노고산장의 관리인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노고산장에서 16년의 세월을 보낸 그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노고산장을 직영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88년 1월 피아골 대피소의 관리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줄곧 피아골 대피소에서 생활했으나, 관리공단이 2009년부터 대피소 운영권을 경쟁입찰을 거쳐 제3자에게 넘기기로 결정하면서 4월 말 지리산을 떠나게 됐다.


<구례 |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