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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남자의 자격> 불안정한 삶의 사회와 예능 프로그램

 이택광 경희대교수·문화평론가

 관심을 끌던 <남자의 자격> 합창단 편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방송을 본 뒤 많은 시청자들은 감동적인 대단원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불협화음의 합창단을 훌륭하게 지도해서 완벽한 조화를 연출한 박칼린에 대한 칭송도 뜨거웠다. 그의 리더십에 대한 발 빠른 입담들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최근 예능프로그램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시간 남는 선남선녀나 ‘아저씨들’이 모여서 농담 따먹기나 하던 방식에서 열정과 노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감동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방향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특정하다기보다, 거의 모든 예능프로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자의 자격>에 앞서서 <무한도전> 역시 봅슬레이와 프로레슬링에 도전함으로써 일찌감치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들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감동을 느끼는 까닭은 ‘사연의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심장>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십대 아이돌이 나와서 고생했던 ‘옛말’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심장>의 경우가 과거사에 대한 것이라면, <무한도전>과 <남자의 자격>이 보여주는 것은 지금 현재 참가자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연’이다.


 도대체 이런 사연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사연의 창조는 곧 세계의 형상화를 의미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사연의 세계는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다. 사연은 기성의 질서를 통해 만들어진 위계를 재구성하고 세계에 대한 앎을 다르게 배치한다. 예를 들어서, <남자의 자격>에서 박칼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연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사연의 주체들에게 확보해준다.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묘사는 이런 서사를 만들어낼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예능프로그램은 묘사에 치중했지 서사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워진 경제 현실과 계급상승에 대한 희망의 상실은 현실을 묘사하기에 급급한 예능프로그램에 대한 공감을 쇠퇴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실제로 <무한도전>이나 <남자의 자격>같은 형식이 예능프로그램의 주종을 이루게 된 까닭은 열악한 한국의 방송제작 환경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값싼 제작비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식간에 엔터테인먼트의 효자종목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청년실업과 4000원 인생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삶’의 사회는 예능프로그램조차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벌이에 쫓기는 ‘서민들’에게 예능프로그램은 ‘놀면서 돈 버는’ 계급에 대한 재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중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문화가 이런 변화를 눈치 채지 않을 수는 없다. 예능프로그램은 더 이상 농담 따먹기로 소일하는 ‘잉여인간’을 마음 편하게 보여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현실은 심각해졌고, 그래서 이들 프로그램은 ‘예능감’에 충만했던 과거의 과장법을 버리고, 리얼리티 TV의 형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과연 이런 변화는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가 이제 중요한 분기점에 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처럼 ‘쥐들의 경쟁’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공감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