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로웰 버그만과 손석희

나는 로웰 버그만을 2000년도에 만났다. 영화 <인사이더>를 통해서였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로웰 버그만의 직업은 방송국 피디. 그는 미국의 사회비리를 파헤치는 유명 방송인이다. 어느 날, 의심스러운 사건 하나를 접수한다.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가 자체 연구한 논문을 입수한 거다.

 

로웰 버그만은 전문용어로 가득한 논문의 해독을 위해 필립 모리스에서 일한다는 제프리 와이겐드 박사(러셀 크로)를 수소문한다. 하지만 박사는 의사소통 부적격이라는 모호한 사유로 담배회사에서 이미 해고된 상태였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해고원인이 담배제조의 비밀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한 로웰 버그만. 그는 담배회사와 한통속인 방송사 대표의 지속적인 취재 중단 지시에도 불구하고 비리를 파헤치는 데 주력한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언론인 손석희가 떠오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대한민국 방송 역사와 함께한 복잡한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24일. 손석희는 최순실 태블릿PC 사건을 특종보도한 JTBC 뉴스룸을 진행했다. 담배회사라는 기업자본과 진검승부를 펼친 로웰 버그만을 능가할 만한 시도였다. 정권의 나팔수로 기생하는 방송매체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손석희 앵커는 정치권력의 집요한 견제를 감수해야만 했다.

 

앵커 손석희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 방송 모습

 

진보세력도 보수세력도 모두 그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력기관이 상습적으로 자행하던 언론통제라는 커다란 산을 등지고 나무에만 공정방송을 강요하는 격이었다. 그는 취임 이후 종편 삼인방의 마지막 퍼즐이던 JTBC를 균형 있고 품위 있는 언론사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다. 

 

실제 CBS 뉴스 <60분> 피디로 활약했던 로웰 버그만의 마지막 선택은 협업이었다. 보도를 포기하라는 내외부의 압박에 몰린 자의 외로운 승부수였다. 로웰 버그만은 직장을 그만둘 각오로 동료 신문사 언론인에게 해당 담배회사의 비리문건을 전달한다. 니코틴 효과를 극대화하는 인체 유해 물질인 암모니아 화합물을 담배에 넣었다는 내용이 문건의 핵심. 여기에 살해 협박에 시달리던 제프리 와이겐드의 소신 있는 폭로가 사건을 밝히는 단초로 작용한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담배회사는 결국 백기를 든다. 필립 모리스를 포함한 담배회사들에 거액의 배상금을 내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로웰 버그만은 인터뷰에서 탐사보도를 하는 기자란 편안한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실을 찾아내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이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탐사보도를 맡은 방송인의 어려움은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한직으로 발령 나거나 징계와 퇴사 압력을 받기도 한다.

 

손석희는 2006년 성균관대학교 강연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후회 없는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정당한 방법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그는 누구보다도 길고 험난한 겨울을 보냈다. 앞으로도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뉴스의 특성상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신뢰받는 언론인이라는 기존의 명성이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선주자와 차기 대통령에 대해서도 정확한 보도를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재벌을 향한 올곧은 비판 또한 중요하다.

 

그는 4월19일 페이스북 ‘소셜스토리-JTBC 사회부’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은 어떤 정부와도 불편한 관계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말하는 불편함이란 기호나 이해관계를 배제한 가치중립적인 시각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손석희의 방송은 지금부터가 본 게임에 속한다. 야구에 비하자면 초반 대량득점 후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던지는 공이 포수가 원하는 위치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완전무결한 언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손석희의 변화구가 더 크고 정교한 궤적을 그리기를 바라면서 JTBC 뉴스룸의 배경음악을 신청한다. 제목은 전람회의 ‘10년의 약속’.

 

이봉호 | 대중문화평론가·<나쁜 생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