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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김정섭의 미디어토크

[미디어스타] ‘여성 단독 앵커’ 시대를 연 김주하

· 트위터 팔로워 10만의 소통 실세, 화면 ‘왼쪽’ 차지할 날 머잖아

                                                        ▲ MBC마감뉴스를 진행하는 김주하 앵커 ⓒ MBC 제공

MBC 김주하 기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MBC의 간판 뉴스 앵커다. 마감 뉴스인 <뉴스24>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현직 방송사 앵커 가운데 가장 지명도가 높다. 뉴스 프로그램의 고정 팬도 많고, 트위터에 10만 명의 팔로워(follower)를 두고 있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도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도 그는 2007년 3월 17일 주말 MBC <뉴스데스크>의 단독 앵커로 발탁됨으로써 ‘지상파 방송사 메인 뉴스의 첫 단독 여성 앵커’란 기록을 세웠다. 지난 2000년 10월30일부터 약 5년 반 동안 엄기영 앵커 등과 평일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뒤였다. 이는 방송계에서 중요한 여권 신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성 앵커의 보조자로 인식되던 기존 여성 앵커의 역할과 이미지를 벗어나 여성이 혼자 주체적으로 뉴스를 소화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메인 뉴스의 첫 단독 여성 앵커

그전까지 방송사 메인뉴스는 남녀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자리도 화면에서 볼 때 왼쪽은 남성, 오른쪽은 여성이 앉는 구도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프레임은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MBC에서는 과거 박영선 앵커(현 민주당 국회의원)가 단독으로 <마감뉴스>를 진행한 예가 있지만 메인뉴스까지 ‘여성 단독’을 허락하진 않았다.
 
이후 사회 분위기가 변하면서 양성평등 실현과 시청률 등을 고려, 방송사들이 발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3년 전에 이뤄진 김 앵커의 메인뉴스 단독 진행은 한국방송계의 이 같은 흐름에 하나의 작은 매듭을 지은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

여성 단독 앵커 시대의 개막은 여성들이 결혼하면 일을 그만둬야 하거나 직무와 인사 등에서 각종 차별을 겪었던 80년대 이전의 방송계와 비교할 때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방송계는 겉으로 보기에 유행의 첨단을 달리고 열린 사고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떤 세계보다 보수적이다. MBC에서도 1983년까지 여성 합격자가 ‘결혼하면 퇴직하겠다’는 각서를 써야 입사를 허용했고, 여기자를 공채한 것도 컬러 TV시대가 시작된 1981년 7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김 앵커가 입사한 후 선배들에게 들은 80년대 이전의 이야기는 방송계 안의 얘기든 밖의 얘기든 믿기 힘든 내용도 많았다. 예를 들어 새벽 방송을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기사들이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며 승차를 거부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엄친딸 앵커, 김주하

오늘날 김주하 앵커를 만든 것은 음성과 외모 등 타고난 조건 외에 끈질기게 이어 온, 꿈을 향한 노력과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속도감 있는 또렷한 음성, 뛰어난 순발력과 현장 적응력은 많은 방송인들이 부러워하는 자질이다.

뉴스 원고가 떠있는 ‘프롬포터’를 보고 진행을 하면서도 시청자와 대화하듯 자연스런 눈빛과 미소를 보내는 자기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다소 남성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중성적인 음성 톤은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 방송에서 오히려 장점이 되었고 적극적인 성격, 넘치는 에너지와 어우러지면서 터프한 매력까지 더해주고 있다. 결혼 후 기자이자 아내, 어머니 등 세 가지 역할을 소화하면서 인간적인 이해와 배려, 겸손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다. 

김 앵커는 이화여대 과학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1997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어린 시절 의사가 꿈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 신문반 활동을 하며 미래의 꿈을 뉴스앵커로 정했다고 한다. 힘겨운 고3 생활을 보낸 뒤 대학에 들어갔다가 대학 2학년 1학기 때 재수를 결심하고, ‘보다 가능성이 많을 것 같은’ 대학에 다시 들어갔다. 방송사 입사에 실패하면 부모님이 원하던 교사가 되려고 사범대를 택했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한 방송사 시험 준비는 녹록치 않았지만 취업 설명회에서 만난 김동건 당시 KBS 아나운서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목소리가 좋은 이규원 아나운서를 벤치마킹해 음성을 연구하고, 현업인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만나면서 궁금증을 풀고 자신감을 길렀다.


벌레가 입 속에 들어가도 방송 진행해

결국 MBC에 입사한 그는 손석희 등 걸출한 선배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았다. 2000년 10월까지 뉴스 프로그램인 <굿모닝 코리아>, <피자의 아침> 등을 통해 앵커로서 자질과 능력을 키웠다. 이후 <뉴스데스크>의 평일과 주말 앵커를 차례로 맡았다. 방송에 대한 집중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지방 촬영 도중 손가락만한 벌레가 입 속으로 들어갔지만 방송을 계속 진행할 정도였다. 그가 쓴 책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에 나오는 얘기다. 

2004년 6월 우연한 기회에 기자로 전업했다. 평일 <뉴스데스크> 앵커시절 사내에서 기자직 공모 공고가 나자 시험을 본 뒤 보도국으로 소속을 바꾼 것이다. 그는 당시 “털털한 성격이 오히려 기자직에 더 잘 맞을 것 같아 신청했다”며 “사회부에서 짜임새 있는 기자 수업을 받은 뒤 국방, 교육, 경제 분야 가운데 하나를 택해 전문기자로 성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MBC는 당시 보도본부(보도국, 보도제작국)와 시사교양국이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제작 주체를 어느 곳으로 하는 게 합당한 지를 놓고 갈등을 빚은 일이 있다. 그러자 보도본부가 나서서 ‘시사보도물은 보도국과 보도제작국에 와서 만드는 게 좋겠다’며 사내 전 직종에 기자직에 대한 문호를 개방했다. 과거 <피자의 아침>처럼 기자와 PD의 협업 프로그램을 만들어봤지만 안착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어서 이처럼 사내 공모를 했던 것이다.

이때 보도본부는 신청자 가운데 김주하를 포함 3명의 사원(아나운서 1, 관리직 1, 영상취재 1)을 취재기자로 선발한 뒤 사회부로 발령 내 기자수업을 받도록 했다. MBC에서는 그 이전에도 박영선·손석희·김현경·백지연씨 등이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전직한 일이 있다.

                                                        ▲  김주하 아나운서 ⓒ MBC 제공
 

김주하는 기자가 된 후 평일에는 주로 9시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취재현장에 나갔다. 경제부, 국제부, 문화팀 등에서도 일했다. 결혼 후 출산 휴가를 받게 되면서 2006년 3월3일 MBC <뉴스데스크> 앵커에서 물러났다. 2007년 3월에는 주말 <뉴스데스크>의 단독 앵커로 복귀해 일을 하다가 2008년 3월24일부터 MBC <뉴스24>의 단독 앵커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뉴스24>의 편집에 참여해 매일 마감뉴스에 적합한 뉴스 아이템을 발굴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아울러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트위터로 시청자와 의견을 나누면서 바람직한 소통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보다 탄탄한 기자와 앵커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중인 만큼 그는 머잖아 자연스럽게 평일 <뉴스데스크>의 왼쪽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벅찬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김정섭 /성신여대 방송영상저널리즘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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