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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들풀의 미디어 뒤집기

[미디어 뒤집기]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김황식 국무총리 후보자는 자신의 누나가 총장으로 있는 대학에 특혜가 이루어졌다는 의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김황식: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을 들으니 불과 보름 전에 유명환 전 통일부 장관이 딸 취업 특혜 의혹에 대해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난다.

유명환: 생각을 해 보세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특혜를 줄 수 있겠어요.

두 사람의 말은 그 아이디어에서부터 구조까지 완전히 똑같다. 그리고 이 똑같은 두 사람의 말은 지금 세상, 혹은 지금 대한민국을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이를테면,

1.
두 사람은 의혹 대상이 된 특혜의 내용이 불공정하고 부정직한 것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일단 그런 상식을 따르고 있다.

2.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지금 세상(혹은 대한민국)에서 이런 특혜는 가능하지 않다고 강력히 부인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설령 본인이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있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개인(권력자)의 의지를 초월한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말이 되겠다. 헛웃음이 나오시는 분들은 잠깐 참으시라.

3.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혹은 환경 때문에 내 딸이, 혹은 내 누나가 특혜를 받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4.
여기에 두 사람은 각기 한 발씩 더 나아가서, 유명환은 '옛날 세상'은 그런 일이 가능했다, 김황식은 '다른 나라(이를테면 북한)'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식의 여운을 남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11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정지윤 기자



국민
4분의 3은 동의하지 않는다

, 이렇게 두 분은 현재 한국 사회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외교부 장관이나 감사원 원장이라는 최고위급 권력이 식솔들을 건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은 공정한 사회라는 그들의 굳은 신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 칭송하고 본받아야 마땅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말이다
. 도저히 우러러 따라지지가 않는다. ? 설득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그 정도로 투명하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 죄송하다. 나는 불손하게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이 두 분과는 정반대로 한국 사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론 조사를 좀 보자. 9월 초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4%'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정부 고위직 인사에 대한 공정성을 묻는 질문에는 74.5%가 불공정하다고 대답했다.

유명환과 김황식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일반 국민은 '지금 세상이 그런 세상이야,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하거든, 엿이나 즐처드셈'이라고 대답하는 꼴이지 않은가.

이처럼,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굳은 신뢰를 가진 건전한 사고방식의 고위 공직자님들과, 매사에 부정적이고 무지몽매한 국민들 사이에 너무나 큰 인식 차이가 난다. 그럼 누구의 인식이 옳은가. 그 대답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 운운한 유명환이 결국 딸의 특혜 취업으로 벌어진 물의와 관련하여 장관직을 사퇴하고, 그 와중에 고위층 자녀들의 온갖 특혜 취업 사례가 드러난 것으로 입증이 되고도 남았다고 본다.

그럼 대체 왜 두 사람은 일반 국민의 인식과는 엄청나게 격차가 있고 사실과도 다른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분은 한국 일부 고위층의 사고방식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프레파라트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 실제로는 '대한민국'이나 '지금 세상'이 그렇게 엄정하다고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육조거리 한 번 나가보지 않은 일반인도 아는 세상의 이치를, 산전수전 다 겪은 최고위 관료들이 모를 리가 있는가. 만일 특혜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딸이나 인척이 아니라 다른 고위 공직자의 딸이나 인척이라면, 두 사람의 발언은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처럼 일반 국민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 일단은 현재 한국 사회가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 이것은 당장 문제가 되는 자신들의 특혜 의혹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대한민국'이나 '지금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게 자기 자신들이라는 의미도 있다. 지금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말하면 자신들이 나쁜 작자들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거꾸로 말하자면, 자기 친인척도 똑같은 특혜를 받았거나 받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야당 인사들이 지금은 마음껏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진전을 변명거리로 삼는 공직자들


그리고 이들은 자식의 취직이나 인척의 사업에 대한 지원 따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 하긴 옛날에는 사람 죽이며 나라도 빼앗았는데, 딸 하나 취직 시키고 친인척이 하는 일 좀 도와준 것은 새발의 피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어디 나만 그런가. 예컨대 한국수자원공사 지방본부장이 말했다고 보도되었듯, 국가 예산은 "먼저 빼 먹는 게 임자", "현실이 그렇지 않냐"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 이들은 자신들이 남들에 비해 비교적 공정하고 정직하다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우호적으로 평가하며,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게 마련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50보 간 사람을 100보 간 사람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다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 또 이런 점에서, 남들에 비해 비교적 공정하고 정직한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나 '지금 세상'이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 문제는 뭔가. 자신들은 공정하고 투명하고 싶지만, 김용옥의 표현에 따르자면 '알아서 기는 새끼들'이 문제일 수 있다. 알아서 기는 새끼들이 알아서 장관님 딸도 취직시켜 주고, 원장님 누나 학교에도 돈뭉치를 안겨 주었을 수도 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 설령 그렇더라도 우리 국민이 보기에 이 사회가 불공정하고 부패한 것은 마찬가지다. 위에서 썩든 중간에서 썩든, 냄새 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게다가, 알아서 기는 새끼들이 알아서 기니까 허허허 하며 좋아할지, 아니면 알아서 긴다고 호통을 치며 재떨이를 집어던질지는 전적으로 권력자 개인의 인격과 덕성에 달린 일이기도 하다.

한편
, 사회가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사실과 다르게 강조하고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어야, 그렇게 오도된 사회의 권력 핵심부에서 더욱 편하게 불공정과 불투명을 통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온갖 의혹과 혐의를 피해 미국으로 떠난 국세청장은 가만 놔두면서, 이 자의 문제를 내부에서 고발한 나주세무서 6급 직원을 파면하는 것으로 조직의 부조리한 구조를 보호하려 한 행위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명환 딸의 특혜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고
, 김황식 누나의 특혜 의혹은 의혹 상태다. 이 글은 두 사안의 의혹 자체가 아니라, 두 사람이 의혹을 부정하면서 쓴 언어와 논리를 들여다 본 것이다. 의혹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김황식의 경우 야당 의원의 공연한 흠집 잡기로 판명이 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동신대의 지원과 김황식은 아무런 관련이 없기를 바라며, 그 학교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으로 입증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윗대가리부터 썩어빠진 세상이라고 한탄하는 국민의 4분의 3이 조금은 덜 실망할 것이 아닌가.

한국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민주화되었고 상대적으로 투명해졌다
. 수많은 사람의 땀과 노력으로 어렵게 어렵게 이룬 성과다. 그런데 이제 이런 성과가 부패한 공직자들의 변명거리로 이용된다. 이런 성과를 거론하며 여기에 기대어 특혜 의혹을 어물쩍 넘기려는 파렴치한들이 지금의 일부 고위 공직자들이다. 그런 말을 하려면 실제로 그런 사회를 만들라. 그리고 자신부터 모범을 보이라.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공정해졌고, '지금 세상'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투명할지 몰라도, 그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핵심은 여전히 시커멓게 썩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가투명도 39로 칠레, 우루과이, 푸에르토리코, 보츠와나보다 못한 한국의 현주소, 입으로는 공정한 사회를 주문처럼 되뇌며 실제로는 특혜와 비리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의 덕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