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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공중의 알 권리’와 명예로운 언론인

최순실 사태는 화수분인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야깃거리가 쏟아진다. 언론은 아직도 특종과 단독보도를 경쟁적으로 내고 있다. 덕분에 시민들은 매일 터지는 뉴스를 챙겨보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듯 새로운 논쟁이 벌어진다. 그중 하나가 언론윤리다.

 

최근 언론윤리와 관련한 논쟁의 한복판에 태블릿PC가 있다. 2016년 10월24일 JTBC가 터뜨린 ‘역대급’ 특종의 원천이자, 보도 다음 날 대통령이 직접 1차 담화로 사과했던 내용을 담은 바로 그 태블릿PC 말이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JTBC가 공식적으로 밝힌 태블릿PC의 입수경로가 석연치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입수경로의 문제와 내용의 사실성 문제는 별개임에도 그렇게 말한다. 심지어 검찰과 특검을 의심하고, 태블릿PC의 법적 증거능력을 문제 삼기도 한다.

 

언론학자인 나는 언론사 취득물의 법적 증거능력에 대해 따로 논할 바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언론사의 명예로운 언론인이라면 최순실 국정개입과 같은 당대의 논쟁적 사안에 대한 증거물을 입수한 경우, 입수경위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확인해서 폭로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 내용이 대통령 업무와 관련한 공적 사안이고, 누구도 몰랐던 새로운 증거를 제시한다면 더욱 그렇다.

 

JTBC가 최순실씨 컴퓨터에서 입수했다고 24일 공개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제목 옆에 ‘신문용‘ ‘재수정’ ‘프롬프터’ 등이 쓰여 있어 대통령 발언 이전 받은 초고임을 알 수 있다. JTBC 제공

 

왜냐하면 언론이란 공중의 알권리를 보장할 것을 임무로 삼아 작동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이니 공정성이니 하는 미묘한 언론이념이나, 이해관계 배제니 취재원 보호니 하는 복잡한 윤리 규범은 실로 단 하나의 원리에서 도출된다. 공중의 이익이란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민주적 여론형성을 위한 공중의 알권리를 뜻한다.

 

무릇 기자라면 견딜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다. 공중이 알아야 할 내용을 먼저 알게 되었는데 보도하지 못하는 일이다. 2014년 11월28일 세계일보가 폭로한 이른바 ‘정윤회 문건’ 보도를 생각해 보자. 2016년 7월26일 TV조선이 보도한 미르재단 모금 의혹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다. 예상되는 반격과 위협을 무릅쓰고 보도하는 것이 언론이다. 알면서 쓰지 않는 언론을 언론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언론은 공중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보도를 위해 심지어 위법한 행위를 할 수도 있는가? 예컨대 법원은 기자가 보호하고 있는 정보원을 공개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검찰은 언론사가 확보한 증거물을 확인하기 위해 압수수색에 나설 수 있다.

 

법원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검찰의 압수수색을 저지하는 일은 위법 행위가 될 수 있는데, 기자로서 이런 경우 어찌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언론윤리 수업 시간에 최초로 제기하고 답하는 문제 중 하나다.

 

미국의 사례가 극적이며 시사적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비록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언론인이 일반 시민 이상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언론인이 취재원 보호를 위해 형사재판에서 증언을 거부하면 법정모독죄로 실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품격 있는 언론사에 종사하는 미국 언론인이 법정모독죄가 무서워서 법정에서 판사의 명령에 굴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기꺼이 형사처벌을 받으면서 언론자유를 실천한 언론인으로 기록에 남기를 바란다. 그게 명예로운 기자로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길이며, 동시에 언론이라는 제도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 규범은 좋은 참고가 된다. 우리는 독일과 달리 취재원 보호와 관련한 법적 조항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르지만, 우리나라 사례로 2003년 양길승 청와대 제1부속실장 향응사건도 되새겨 볼 만하다. 당시 한국일보는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향응을 받았다는 폭로를 먼저 했고, 이어서 SBS가 술자리 장면을 찍은 몰래카메라를 입수해서 방송했다. 수사를 담당했던 청주지검 전담팀은 몰래카메라 영상을 증거물로 확보하기 위해 SBS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기자들이 언론탄압이라고 저항하는 가운데, 검찰은 2시간 만에 영장집행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언론학자 이민웅은 2008년 출간한 <저널리즘의 본질과 실천>이란 책에서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SBS 기자들이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집행을 거부한 것은 공중의 알권리를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으며,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을 감수함으로써 언론사에 대한 신뢰도는 오히려 올라갔을 것이라고.

 

요컨대,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에게 시민으로서 권리 이외에 어떤 특권도 별도로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명예로운 언론인은 온갖 현실적 위험과 예상되는 위협을 무릅쓰고도 보도할 뿐이다. 오직 민주적 여론형성을 위한 공중의 토론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