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에 목마른 시대다. 모두가 사실을 구한다. 사실이 귀하다 보니, 사소한 사실에도 격하게 감동하나 보다. ‘팩트폭력’이란 표현이 유행이란다.

 

침도 튀지 않고 이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이를 보면 용하다 싶기도 하지만, 어쩌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실과 폭력을 하나로 엮은 단어가 유행할 지경이 됐나 싶어 서글퍼진다.

‘가짜뉴스’는 또 뭔가. 일단 원조를 살펴보자. 마케도니아에 사는 한 청년이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트럼프 지지 웹사이트를 운영해서 돈을 벌었는데, 그 웹사이트에 게재된 뉴스가 권위 있는 언론사의 기사처럼 포맷된 글이었다고 한다. 가짜뉴스란 실은 ‘기만적 기사’였던 셈이다.

 

기만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챙기는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사실에 목마른 시대에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기사 비슷한 것을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청년의 의도와 기획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점은 이 웹사이트에서 뉴스를 챙겨 보고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한 미국 시민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처: 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이 아직도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가 있다. 가짜뉴스가 지난 선거판을 흔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클린턴 선거본부에 아동 포르노그래피와 인신매매 혐의가 있다는 ‘뉴스’가 떠돌았고, 플로리다주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플로리다에 이슬람 율법을 도입하려 한다는 ‘뉴스’가 흘렀다. 선거판에 인신공격과 마타도어가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아동 포르노그래피와 이슬람 율법에 대한 것이며, 형식이 뉴스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가짜뉴스란 용어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가짜뉴스의 반대말이 있다면 ‘진짜뉴스’일 텐데, 진짜뉴스라도 반드시 참이란 보장이 없다. 모든 뉴스란 모종의 사실에 대한 관찰을 담기 마련일 뿐, 정작 그 내용이 참인지 아닌지는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참이 아닌 내용을 담은 뉴스도 얼마든지 가치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용어에 홀리지 말자. 문제는 거짓 정보가 뉴스처럼 쉽게 유통되는 현실에 있다.

 

선거란, 아니 일반적으로 정치란 결국 사실을 전략적으로 다루는 경쟁이다. 정치적 공격이란 흔히 상대편에 대한 ‘과거 사실의 재구성’이며, 선거공약이란 ‘미래 사실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를 노려서 정략적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후려치듯이 말하고 빠지는 행동을 하는 경우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자가 이렇게 행동하고, 그런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이 절반이 넘는 나라가 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치고 빠지는 데 능하다. 그리고 미국 국민의 절반이 그런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트럼프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유력 일간지의 보도를 문제 삼아 ‘명예훼손법을 풀어 헤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게 공약인지 뭔지 누구도 확인할 생각을 못했는데, 이유는 만약 그 위협이 진지한 것이라면 미국 헌법과 대법원 판례를 완전히 무시한 허황된 말이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이 투표자 득표에서 뒤진 이유가 500만표가 불법 투표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취임식에 150만 시민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후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고, 전자는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도 없는 말이다. 트럼프도 문제지만, 그의 지지자들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트럼프의 거짓말에 어쩐지 무심한 듯 보인다. 나머지 절반의 시민이 대통령이 된 자의 거짓말과 치고 빠지기 식의 레토릭에 분통을 터뜨리든 말든 말이다.

 

여기 미국보다 더한 나라가 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찬성하는 일을 불순분자들의 책동이라고 몰아붙이는 세력이 아직 집권당에 속한 나라다. 이들은 과거 한 도시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간첩이 주동한 결과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이 떠돌았던 당시라면 사실 확인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변명이 가능했겠지만, 이후 반대 사실과 증거가 산처럼 쌓여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통령의 거짓말과 그 측근의 국정농단에 분노하는 다른 시민들의 정의감을 무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쁜 의도가 있다고 몰아붙인다. 이런 나라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가짜뉴스는 이상한 정도겠지만, 왜곡된 언사와 무심한 태도가 어울려 만들어 내는 현실은 참혹하다. 왜냐하면 왜곡을 폭로하고 무심함을 깨우치려는 자들의 저항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저항은 흔히 처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뉴스란 개념은 가능할까? 이 용어는 어쩐지 젠체하고 과장하는 듯 들린다. 그러나 만약 진짜뉴스란 게 있다면, 나는 그것이 왜곡과 무심함이 초래한 참혹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내용일 거라 믿는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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