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고백, 잠시 전하는 말씀 듣겠습니다

한주를 무사히 끝낸 밤마다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던 예전 기억을 이야기하는 분들을 종종 뵙습니다. 식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팝콘 대신 찐 옥수수를 들고 흔하지 않은 볼거리를 기다리던 추억이었지요. 영화 <영광의 탈출>의 OST와 함께 은막의 스타들의 얼굴이 흐르던 오프닝에는 ‘제공’이라는 글씨 아래 세로로 광고주 이름들이 줄줄이 씌어 있었습니다. 한껏 기대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TV 앞에 자리 잡았지만 상영시간에 비례해 늘어난 광고의 개수는 본편이 시작되기까지 하릴없이 참아내야 하는, 영화를 공짜로 보기 위한 마지막 수고를 요구하였습니다.

 

1886년 한성주보에 실린 세창양행의 ‘고백’ 광고가 우리나라 근대 광고의 효시로 봅니다. ‘고백’이라는 단어는 개화기 시절 광고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하는데 그야말로 진심을 담아서 소비자에게 이야기한다는 느낌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신문 광고를 모은 책인 김명환의 <모던 씨크 명랑>을 보면 그 당시 일상의 욕망에 대한 과감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와인을 정력에 좋은 물건으로 판매하는 것에서부터 콘돔과 누드 사진집에 이르기까지 요즘의 눈높이에도 용감한(?) 광고들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우리네가 복날 삼계탕을 먹는 것처럼 이웃 섬나라 사람들이 더운 여름날 장어를 먹는 풍습 또한 광고와 연관되어 있다 합니다. 난학자 히라가 겐나이가 한자로 ‘소의 날’에는 ‘우’자로 시작하는 음식인 ‘장어(우나기)’를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문안을 만들어서 장어집 간판에 걸게 하여 매출 하락에 울상짓던 식당에 손님이 몰려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상술의 원조쯤 될 듯하네요.

 

홍보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니어스 바넘은 지금도 바넘 효과라 부르는 용어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대중은 속기 위해 태어난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합니다. 그가 몸담았던 쇼비즈니스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면 장난이라 치부할 수 있겠으나 그 대상과 메시지가 정치나 사회분야로 이전하여 심각한 대중 기만으로 전이된다면 최근 몇년 전부터 많은 나라의 정치적 쟁점에 불을 댕긴 페이크 뉴스가 오버랩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홍보라는 분야를 산업화하였습니다. 아이보리 비누로 조각대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비누를 친숙하게 만들었고 미국인의 아침식사에 그전까지는 먹지 않던 기름진 베이컨을 의사의 권위를 통해 계란과 함께 올리게 만들어 미국인들의 동맥경화 확률을 높였습니다. 1928년 책 <프로파간다>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파한 버네이스는 ‘집단 습관’을 만들어 시장을 개척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 책은 “대중의 조직된 습관과 의견에 대한 의식적이고 지적인 조작은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보여지는 것보다 제안받는 것을 통해, 그리고 반복되고 상호 간에 공통으로 믿음되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의 습관’이 형성됨을 간파한 것입니다.

 

문제는 나치 정권을 홍보하던 독일의 괴벨스가 그의 팬이었다는 것입니다. 괴벨스의 나치는 정치 선전 도구로서 라디오를 보급하여 전체 국민들에게 동일한 선전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 인류적 비극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스마트폰의 확산과 유튜브의 도래로 만들어진 15분 이내의 스낵컬처도 이젠 너무 길어 불과 수십초로 콘텐츠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히려 광고가 본편보다 더  길어지고 제작에 많은 공력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광고 자체가 콘텐츠로 자리 잡아 광고를 보기 위해서 다른 광고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10대는 어렸을 때부터 광고와 콘텐츠가 분리되지 않아 광고 자체에 거부감이 적습니다. 지상파의 경우 본편 길이에 비례해 광고 시간과 그 형식이 제한되었지만 디지털상에서는 상업적인 메시지 자체에 대한 제한이 상대적으로 느슨합니다. 무료 게임 역시 광고를 통해 게임 아이템의 형식으로 즉각적인 보상이 이뤄지면서 사람들에게 광고가 유용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형성합니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 같은 내용에 똑같은 길이의 광고들을 주르륵 보던 경험과는 사뭇 다른 상황으로, 광고 자체가 게임처럼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고 그 내용 역시 나의 취향에 맞춰주니 더욱 그러합니다. 이제 광고는 귀찮고 싫은 것, 좋은 것을 보기 위해 모두가 같은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것에서 흥미롭고 그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매월 사용료를 지불하는 스포티파이나 넷플릭스처럼, 그리고 앱 안에서 구매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광고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널리 쓰이는 것처럼 많은 콘텐츠들은 자체적인 유료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콘텐츠 역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처럼 상품으로서의 온전한 대우를 받는 세상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고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2016년 뉴욕대학의 마케팅 교수 스콧 갤러웨이가 말한 “광고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 내는 세금이 되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힌트가 될 수 있을까요?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