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아찔한 ‘지지율 경마보도’

특검과 헌재와 대선의 시간이 동시에 흐른다. 불확실성. 혼돈.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누구나 장담하는 시간이다. 이재용이 구속됐다. 헌재는 최종변론 시간을 잡았다. 광장엔 촛불과 태극기가 대립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시간이다. 불안한 일상을 견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해지기로 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거꾸로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너무나도 복잡하니 단순해야 살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단순한 동물이니까. 뇌과학은 인간의 반복 욕구를 증명했다. 인간의 반복 욕구는 어떤 동물보다도 강렬하다. MIT 교수 토머스 포조는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일반화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진화적 본능. 아무런 양상도 없는 곳에서 양상을 보는 능력이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없어도 본다. 보이지 않아도 본다. 일찍이 앨빈 토플러도 “세상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데 인간의 방어체계는 사람들이 갖는 편견을 굳히는 방식으로 세상을 단순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순한 프레임이 현실을 왜곡한다. 내 편 아니면 네 편. 적 아니면 동지. 정보와 지식은 이해되기도 전에 다운로드된다.

 

대선보도는 경마로 집중된다. 지지율. 정책은 복잡하고 숫자는 단순하니까. 트럼프 당선을 맞히지 못한 여론조사의 한계는 까맣게 잊는다. 잊는 게 편하다. 비록 틀릴지라도 일단 숫자를 들이대면 사람들은 중독된다. 순간, 숫자가 진실로 인식된다. 대선후보를 숫자로 치환한다. ‘손석희 TV’(JTBC)도 대선후보 연속 대담을 하면서 “정책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 다음에 하고 후보 경쟁력 등에 집중”한다고 했다. 경쟁력=지지율이다. 손석희마저 그랬다. 특검 보도는 심층적이지만 대선후보 검증은 단순하게 질주한다. 인터뷰의 절반은 지지율로 채워진다. 대개의 언론이 그런 식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대 대선 불출마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권호욱 기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때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런데 너무 일찍 사라져 버렸다. 반기문이 출마 선언한 적이 있었나 궁금해진다. 출마 선언도 안 했는데 불출마 선언을 한다. 그를 불러낸 건 오직 지지율이다. 반기문이 될 거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제 아예 반기문을 몰랐던 사람처럼 말한다. 숫자가 떨어지니 존재도 사라진 거다. ‘착월선후’라고 했나. ‘선’은 죽일 선 자다. 착월선후는 달을 잡으려다 원숭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진짜 달이 아니라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모든 원숭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반기문은 어떤 달이었을까?

 

미국의 선거 예측 전문가 네이트 실버. 그도 트럼프를 예측하지 못했다. 뭐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틀렸다곤 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경선도 본선도 다 틀렸다. 미국의 모든 여론조사가 그랬다. 언론도 거의 클린턴 당선을 예측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론조사가 대선을 이끌고 있다. 1%만 움직여도 폭락, 폭등! 매일매일 진리처럼 실어나른다. 천하의 네이트 실버가 말했다. “우리는 마치 시골벌판을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불을 지르는 전문-야만인(pundit-barbarian) 같았다”고.

 

반기문이 사라지니 황교안을 불러낸다. 황교안은 출마한 걸까? 언론도 본인도 노코멘트다. 황 총리는 탄핵심판 중인 대통령의 권한대행이자 박근혜 정부 핵심이다. 그런데도 여론조사에 포함시킨다. 정의롭지 않은 숫자놀음이다. 정치스캔들로 국가가 위기에 빠졌는데, 권한대행까지 경주마를 만드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일이다.

 

경마가 재밌다고 치자. 맞기는 할까? 지난 총선 때도 완전히 틀렸었다. 새누리당 과반이 무너진다고 예측한 조사를 본 적이 없다. 조사방법도 검증이 안됐다. 모바일 샘플링은 적당한가? 지금 우리 국민은 숫자로 된 거대한 공간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미국 대선 직후 CNN은 여론조사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공화당 전략가 마이크 머피는 트럼프가 당선된 날 데이터에 기반을 둔 여론분석은 오늘 밤 사망했다고 했다. 문제는 여론조사가 부정확할수록 경마보도는 페이크뉴스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다른 보도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탄핵 중인 대통령의 고향인 TK 민심 르포라든가, 엄청난 투표율을 보일 것 같은 20대의 예측불가한 의식의 흐름 같은 거 말이다. 탄핵이 인용되고 나면 대선 상황도 어떻게 급변할지 알 수 없다.

 

지금 무응답층은 누구일까. 편향이 있다면 어디서 발생할까. 정치는 숫자놀음이 아니다. 물론 모든 여론조사가 정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경마보도를 넘어 경마보도주의가 횡행하면 결국 누가 불행해지는 걸까?

 

대통령을 뽑기 위한 국민들의 선택권을 틀린 숫자들이 보장할 수는 없다.

이래선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도 찾기 어렵다.

 

유승찬 | 스토리닷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