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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도래는 과제다. 이방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다. 환대하면 좋겠지만 조심해야 한다. 조심함이 지나쳐 무례하면 추하다. 무신경하게 무례함을 반복하면, 그것은 잔인하다. 잔인한 인간들이 사는 나라를 좋은 나라라 할 수 없다. 난민을 다루는 법을 보면 국가의 품격을 알 수 있다.

 

예멘 난민을 다루는 일부 언론보도에 유감이다. 온통 혐오뿐이기 때문이다. 난민 혐오, 이슬람 혐오, 무슬림 혐오, 예멘 혐오, 그리고 이 모두를 조합하고 확장한 것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 혐오에 대한 고발과 규탄이 넘치다보니 혐오에 대한 혐오가 자연스럽다. 기독교 혐오, 여성주의 혐오, 구직자 혐오, 그리고 ‘우리가 이 수준이지 뭐’라는 식의 자기혐오도 보인다.

 

언론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혐오’라 부른다. 그리고 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콧바람을 뿜는데, 실로 여기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여성혐오가 대표적이다. 여성혐오라 말하기도 혐오스럽다는 듯 ‘여혐’이라 짧게 통용되는 이 용어는 많은 현상을 가리킨다. 여자를 미워하는 마음, 나약한 여자를 노린 범죄,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 여성성을 왜곡하는 묘사 등 다층적이다. 여성에 대한 관습적 억압, 사회적 차별, 그리고 이념적 대상화를 더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여혐이라면, 그렇다, 혐오가 아닌 게 없다.

 

“아빠 여기서 살 수 있나요?”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예멘 난민 모하메드가 8개월 된 아들 함자와함께 제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지윤 기자

 

과연 그렇다는 게 요점일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억압과 차별을 벌주고, 여성에 대한 증오를 제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혐오를 말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혐오담론으로 학대와 착취를 처벌하고, 차별과 배제에 대항할 수 있을까. 저항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고, 처벌하려면 법을 만들어야 한다. 학대와 착취는 범죄이며 여혐이 아니라도 그렇다. 차별과 배제는 인권침해이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삼으면 절로 그렇다.

 

예멘 난민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일단 제주도에 상륙한 486명의 예멘 난민의 운명에 대해 말하자면, 누가 무엇을 어째서 혐오하는지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갖춘 국가다. 법에 따라 난민 인정에 관한 신청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난민 신청자는 변호사의 조력은 물론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의 동석을 요구할 수 있다. 신청자는 또한 심사 결과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으며, 이의신청 결과에 대해서도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법무부 장관은 난민 신청자에게 유리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해서 활용할 의무가 있으며,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생계비와 의료 지원, 그리고 주거시설 지원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론은 법으로 정한 바에 따라 예멘 난민의 난민 신청, 심사, 이의신청 및 행정심판 과정에 어려움이 없는지 살피면 될 일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이미 난민 신청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업했다는 이유로 그를 구금하거나 추방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법적으로 판단했던 나라다. 당시 재판장은 판결에서 난민 신청자의 취업활동을 공공의 안전을 해쳤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한 난민 신청자들이 심사와 이의신청을 거치면서 장기간 난민의 상태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특별히 언급했다. 난민 신청자의 취업활동을 제한하는 일은 “보호를 방기”하는 일이기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부정의가 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이 ‘난민 혐오’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예멘 난민을 계기로 삼아 여론몰이를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난민법과 무사증 입국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중에는 확실히 우려스러운 자들도 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관광으로 와서 돈을 쓰고 가는 것은 좋지만, 난민 신청을 이유로 도착해서 취업하려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가 다른 종교를 주로 믿는 민족국가에 가서 포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민족국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안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외국 사업가가 교묘한 인종차별로 아시아계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일을 규탄하면서, 한국 사업가들은 다른 인종 노동자를 차별하고 피부가 밝은 사람만 고용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도 있다. 이런 일을 모두 ‘혐오’라 하면, 글쎄 그것은 얄팍한 자기모순을 심오한 감정으로 격상하는 일이 된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억압을 강제하는 일은 혐오스럽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부정의다. 법이나 윤리를 공정하게 적용할 것을 거부하는 일은 혐오스럽지 않더라도 부당하다. 자신은 권리만 챙기면서 남의 권리를 짓밟겠다는 의도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부정의와 싸우고, 부당함을 고치며, 가증스러운 일을 미워하는 데 혐오담론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혐오가 나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혐오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혐오가 소용없다면, 혐오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일부 언론이 왜 이렇게 혐오에 집착하는지 알 것도 같지만, 차마 여기에서 밝힐 수 없다.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