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드루킹이 매크로를 이용해서 포털 댓글을 조작하는 일도 더 이상 없다. 그런데 인터넷 여론은 왜 또 이렇게 어수선한가? 난민과 동성애 사안에 특별히 민감하지 않은 이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온갖 수상쩍은 말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세력이 있음이 밝혀졌다. 지난 27일 한겨레는 ‘동성애·난민 혐오 가짜뉴스 공장’이란 기사에서 폭로했다. 에스더기도운동이라는 한 기독교 운동단체가 동성애 반대, 인권조례 폐지, 차별금지법 반대 등과 관련한 내용물을 유튜브와 카카오톡에서 조직적으로 퍼뜨렸다는 내용이다. 난민에 대한 증오 발언과 동성애 혐오 담론을 전파한 경로도 소상하게 밝혔다. 추가 폭로가 기대되는 모범적인 탐사보도였다.

 

한겨레 보도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일단 기사에 달린 댓글이 폭발적이다. 난민 증오와 동성애 혐오와 관련한 해외 가짜뉴스의 허위성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종교적 교리와 종파적 이단 논쟁이 겹쳐서 혼란스럽다. 와중에 한겨레를 멸칭으로 부르며 너희야말로 ‘가짜뉴스’의 본산이라고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뚜렷하다. 한겨레는 후속보도에서 에스더기도운동이 한겨레 탐사보도 기사에 이른바 ‘좌표를 찍고’ 댓글 참여를 독려했다고 폭로했다.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은 단순한 인터넷 여론조작 사안이 아니다. 일단 과거의 여론조작 사건과 달리 공무원의 직권남용이나 사업자에 대한 업무방해의 문제는 없다. 진지하게 믿는 자들이 난민과 동성애 문제에 대해 인터넷 매체를 활용해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발생한 일이다. 증오와 혐오를 동원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지만, 이는 분명 종교와 발언의 자유를 행사한 자발적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생긴 일이다.

 

이 사안은 또한 ‘가짜뉴스’ 문제를 넘어선다. 난민과 동성애 증오범죄에 대한 해외 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작업은 물론 필요하다. 언론의 전문성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논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로 사실성이란 때로 더 큰 싸움의 미끼로 작용한다.

 

예컨대, 증오의 확대를 노리는 세력은 명백한 허위주장도 쓸모 있다고 사용하는데, 주장의 허위성을 밝힌다고 해도 증오는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허위사실을 밝힌 편은 공들여 작은 진실을 얻고도 여론에서 밀릴 수 있다.

 

단순한 여론조작이나 ‘가짜뉴스’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일종의 도덕전쟁이다. 소수자 인권, 양심과 종교의 자유, 발언의 자유 등 자유의 여러 이름들과 그에 필적하는 이념과 가치들이 동원된 담론 투쟁이기도 하다.

 

따라서 쉽게 결판날 일도 아니며, 결과보다 방법이 더 중요한 전쟁이 된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지느냐가 관건인 싸움이라는 것이다. 다음 두 가지 요점이 내 주장을 뒷받침한다.

 

첫째, 상대방의 발언을 틀어막는 방식은 일단 위험하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물론 혐오를 표현하는 발언마저 사전적으로 규제하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 이를 통해서 도덕전쟁에서 일거에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명하고 공개적인 담론 경쟁을 회피하고 국가권력을 포함한 외부 세력을 동원해서 증오와 혐오성 발언을 청소하려 한다.

 

증오와 혐오 표현을 없앤 사회는 얼마나 깔끔할까. 그러나 증오의 표상을 청소하듯 없앤다고 해서 증오를 낳는 억압적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현실에 따른 불행한 정신이 어디로 가지도 않는다. 숨겨진 혐오는 잔인한 생각을 낳고, 억눌린 증오는 치밀한 복수를 예고한다. 이런 감정은 심지어 도덕적 우월감을 강화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사상과 발언의 자유를 탄압했던 일을 생각해 보라.

 

투명하고 공개적인 담론 경쟁으로 설득할 수 없기에 상대편의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딱한 일이다. 스스로 무능함을 입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득할 수 있음에도 규제정책을 택한다면 일단은 태만을 범하는 일이지만, 또한 동시에 무모하다. 환경미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전쟁을 통해서 세상이 바뀐다면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성격이 결정되기에 그럴 것이다. 한쪽은 양심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발언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존엄성 그리고 행복추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말이다. 다른 쪽은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존엄성, 자기계발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다.

 

누가 이런 자유들이 말뿐이라고 했나. 자유란 이름으로 불리는,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삶의 양식들이 충돌하고 있다. 충돌의 해법에 따라서, 우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한 삶의 양식이 다른 쪽의 양보와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모든 삶의 양식들은 결국 서로 조정이 불가피한 불안정한 자유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를 것이다.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