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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표절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전제

‘모방은 가장 진정한 아첨이다’라는 경구로 유명한 콜턴이란 200년 전 영국 작가가 있다. 그는 ‘고대인을 베끼면 박식하다 칭찬받겠지만, 현대인을 베끼면 표절이라 비난받는다’는 말도 남겼다. 현대 작가들은 냉소적이어서 ‘한 권을 베끼면 표절이지만, 여러 권을 베끼면 연구가 된다’는 구절을 언급하기 좋아한다. 문제는 이 구절을 사용한 원저자를 인용한 경우가 별로 없다는 데 있다.

 

표절 시비가 한창인 걸 보니, 인사청문회 시즌임이 틀림없다. 학회의 윤리위원회가 아닌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학술논문의 연구윤리를 검증하고, 이를 전 국민이 시청하는 괴이한 한국적 상황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창의적 사상이나 진정한 표현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연구윤리를 논한다. 인사청문회가 아니라면 학술논문을 펼쳐볼 일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표절을 말한다.

 

하필 학술적 표절을 문제 삼을까?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표절을 흔히 ‘남의 글을 훔치는 일’이라 하는데, 정적을 절도범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정치인은 없다. 또한 요즘은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거의 모든 문서를 검색할 수 있다. 논문 간 중복률을 계산하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표절용의’ 논문을 잡아낸다. 따라서 연구분야별 비전문가라도 누구나 표절을 판정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전자는 오해이며, 후자는 잘못된 전제를 따른다. 오해와 잘못된 전제를 기초로 표절을 규정하고 표절자를 절도범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애초에 표절을 경계하던 창의 공동체의 고유한 목적이 가려진다. 창의적 지식을 격려하고 진정하고 본원적인 표현을 존중하는 학술세계의 가치가 훼손된다. 오해를 풀고, 잘못된 전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첫째, 표절은 절도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속임수에 가깝다. 표절이란 다른 작가의 글을 훔쳐서 그 작가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남의 글을 자기 글인 듯 써서 독자를 기만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이다. 남을 속이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도리는 없으며, 따라서 학술세계는 표절을 윤리적으로 제재한다. 그러나 표절은 그 자체로 불법행위도 아니고 범죄는 더욱 아니다.

 

표절을 불법으로 오해하는 이들은 흔히 표절과 저작권 침해를 헷갈려 한다. 저작권 침해는 저작자의 저작권 또는 인격권을 침해하는 일로 민사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며, 형사상 고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작권 침해라고 해서 모두 표절은 아니며, 표절이라고 해서 저절로 저작권 침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생각 그 자체를 베끼는 저작권 침해란 불가능하며 (표현을 베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실 표현에 대한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는 나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생각과 사실 표현을 베끼는 일 모두 표절시비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여 다른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은 표절에서 자유롭지만, 실질적 저작권 침해의 소지를 갖는다. 따라서 표절자를 절도범으로 몰아세우지 말자. 표절자가 개탄스러운 이유는 그가 독자를 속이고, 그가 속한 창의문화를 훼손하기 때문이지, 무엇을 훔쳤기 때문은 아니다.

 

둘째, 비전문가라도 데이터베이스 검색과 소프트웨어 판정을 이용해 표절을 잡을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몇 단어가 겹치면 표절이고, 몇 문장이 연속으로 이어지면 표절이라는 식의 판정기준을 적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해당분야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학술논문의 표절을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모두 ‘표절판정의 기법’을 들어 표절 자체를 규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표절 규제는 창의문화의 보호를 목적으로 삼는다. 표절을 문제 삼고 처벌하는 단위가 창의문화를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컨대 민속음악에 뿌리를 둔 대중가요의 표절, 평민적 놀이문화에서 온 스탠드업 코미디의 표절, 그리고 학술논문의 표절에 대한 판정 규범이 각각 다르다.

 

당연히 학술세계 내에서도 학문분야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절판정 규범과 기준을 갖는다. 학문분야마다 창의성이 발현하는 양상이 다르고, 발견의 ‘새로움’을 규정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한 분야의 발견이 다른 분야에서 상식인 경우가 있다. 또한 표절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주를 달고 인용하는 일인데, 인용하고 주석하는 방법도 분야마다 다르다. 요컨대 개별 학문분야에서 창의적 활동에 기여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고는 해당분야의 표절 규범을 확인해서 판정할 수 없다.

 

표절이란 정치적 공방의 미끼는커녕 학술적 토론의 주제가 되기에도 미묘한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절을 정략적으로 남용하는 우리 현실이 무참하다. 정계의 저열함도 문제지만, 학계의 무력함 탓도 있다. 우리 학술 공동체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립하고 방어하는 데 사용해야 할 장치를 정쟁의 도구로 넘겨주고 있다. 연구윤리 자체가 정략의 대상이 되어 공중의 염려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무심하다.

 

[일러두기] 이 글은 일종의 ‘자기표절’을 범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연구윤리 교육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제 논문의 핵심 주장을 인용없이 끌어다 썼기 때문입니다. 학문윤리에서 ‘자기표절’을 문제삼는 게 왜 모순인지, 또한 학술 공동체에서 ‘이중게재’나 ‘무리한 활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제 원논문(rhee.snu.ac.kr/paper/plagiarism2015.pdf)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