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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명백한 승리다. 결정적 승리의 경험이 별로 없던 한국 언론에 귀중한 승리다. 최순실 보도에서 박근혜 탄핵에 이르기까지 우리 언론은 몇 번이나 실패할 뻔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특종은 개헌론 앞에 엎어질 뻔했고, 태블릿PC 특종은 언론윤리 논쟁으로 자빠질 뻔했다. 그러나 해냈다. 우리 언론은 탄핵정국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박근혜 탄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승리의 경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것을 기억하고 의미화하는 일이다. 그래야 계속해서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남은 일이 많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해외자산에 대한 의혹은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세월호 사태의 원인과 정부의 무대책에 대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후배 언론인들이 역사책에 기록된 ‘박근혜 탄핵과 언론 보도’를 읽고 자란 후배들이 물어올 것이다. 탄핵정국을 만들어낼 때 어떠했냐고. 어떻게 승리했냐고. 그때 변명이나 회한이 아닌 설명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좋았던 2017년에 대한 추억이 아닌, 2017년에 시작한 언론의 전통에 대한 해석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라도 이번 승리를 기억하고 의미화할 필요가 있다.

 

빛나는 탐사보도의 전통을 갖고 있는 미국 언론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언론학자 차배근의 <미국신문발달사>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까지도 미국 언론을 움직인 힘은 정파적 이해관계와 상업주의적 동기였다. 탐사보도는 제도권 언론의 안팎에 저류로 흘렀지만, 20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주류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워터게이트 탐사보도가 결정적이었다. ‘언론이 대통령을 내쫓았다’는 신화가 그때 만들어졌다. 1972년 6월의 한밤중에 5인의 괴한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해 도청장비를 설치하려다 붙잡혔다. 워싱턴포스트는 이틀 뒤 그중 한 명이 공화당 관계자라는 보도를 냈다. 이른바 신화의 시작이다. 1974년 8월 닉슨 대통령은 사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기여한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그러나 도청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워싱턴포스트의 두 청년 기자가 없었더라면 워터게이트는 역사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보도 이전에도 권력을 비판하는 뉴스는 얼마든지 있었다. ‘외로운 팸플릿 작성자’가 있었으며 ‘추문폭로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선정적 언론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황색언론’도 부패한 정치인과 기업의 비리를 고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이후 미국 언론인은 자세가 달라졌다. 과거 정부 관료나 정치인에 의존하는 기사작성 관행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순보도가 감소하고, 해석적 기사는 증가했다. 권력에 비판적인 자세가 확립됐다.

 

워터게이트 보도가 신화적 지위를 누리는 까닭이 있다. 미국 언론인들이 그 경험을 의미화해 자신의 전통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조작과 거짓을 일삼던 대통령을 내쫓는 데 기여한 언론은 자기 힘을 알아채는 데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미국의 언론학자 마이클 셔슨은 최신작 <알 권리의 출현>에서 “워터게이트는 단순히 언론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언론의 상상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이제 누구도 워터게이트를 언급하지 않고 언론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우리 언론의 최순실 보도에는 미국의 워터게이트 보도를 뛰어넘는 요소가 많다. 지금까지 언론이 파헤친 국정농단의 범위와 깊이만 봐도 압도적이다. 등장인물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재벌과 최고 관료들, 그리고 의사와 검사는 물론 가방 제작자와 주사 아줌마까지 이어진다. 관련 기관과 제도도 그렇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질서의 각 분야를 망라한다.

 

그러나 최순실 보도가 워터게이트에 필적할 수준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려면 후속 작업이 필요하다. 결정적인 성공을 의미화해서 기억하고, 계속해서 이어가는 작업 말이다. 최순실 보도가 우리 언론의 우연한, 또는 기회주의적 성공이라 평가될지, 아니면 새로운 전통의 시작이라 평가될지 여부가 여기에 달렸다.

 

심지어 한국 언론의 정치적 영향력도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워터게이트는 닉슨의 사임으로 끝났지만, 최순실 보도는 박근혜 탄핵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이란 앞으로 이어질 본격적인 언론의 활약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실 최순실 보도 전까지 한국 언론은 주로 오래된 질서의 일부로 작동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도 기여자였다기보다 수혜자에 가까웠다. 이런 언론이 최순실 보도와 박근혜 탄핵으로 놀라운 반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언론이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에 필수적이라는 명제를 증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 기회를 살릴지 말지는 오직 언론의 자성에 달렸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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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