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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부산 '인디고 서원' 허아람 대표 “천박한 교육 풍토 우울… 그래도 희망은 있다”

ㆍ청소년 인문서점 부산 ‘인디고 서원’ 허아람 대표

일반적으로 중·고등학생들은 국어·영어·수학을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느라 바쁘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나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읽기 위해 시간을 따로 내는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 ‘인디고 서원’에 드나드는 학생들은 이런 인문학 서적을 한 달에 4~6권씩 꼬박꼬박 읽는다. 학생들은 독서 세미나를 다달이 열고, 두툼한 인문학 잡지도 직접 펴낸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인디고 서원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오는 8월이면 인디고 서원이 문을 연 지 만 5년이 된다. 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대표(38)는 지난달 ‘영코리언어워드 위원회’가 한국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주는 ‘한국청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문학으로는 돈 벌기 어렵다는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디고 서원을 흔들림없이 이끌어온 허 대표를 지난 8일 만났다.


-8월28일이면 인디고 서원이 문을 연 지 5주년이 됩니다.
“올해는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해입니다. 제가 ‘아람샘’이라는 이름으로 부산 학생들에게 독서 지도를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거든요. 2004년 8월 서원을 열고 언론 인터뷰를 할 때 제가 기자들한테 ‘빚을 져서라도 5년은 지켜내겠다’고 약속했던 게 있어요. ‘곧 문 닫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이 많았거든요. 서원이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점에 개인적으로 성취감을 느낍니다.”


-서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는 이제 지나간 겁니까.
“사실 최근에 굉장히 큰 위기가 있었어요. 책만 팔아서는 직원들 인건비를 충당하는 것도 힘듭니다. 서원 자체의 운영에만 집중하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책이 안 팔려서 너무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울 때 일을 더 많이 도모하는 것이 저희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서원은 43㎡(13평)짜리 작은 공간에서 출발했는데 지금 있는 곳은 4층짜리 새 건물입니다. 겉만 봐서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없겠는데요.
“2007년 10월 이곳으로 이사했는데, 사실 이 건물은 은행 융자금을 얻어서 지은 집이에요. ‘건물을 신축할 만큼 큰돈을 어디서 구했냐’는, 돈의 출처에 관한 소문이 무성해요.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소문은 편견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고 그런 소문에 에너지를 허비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지금도 중·고등학생들에게 직접 독서 수업을 하고 있습니까.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6시간씩 하고 있어요. 서원 세우기 전에는 일주일 내내 했으니까 요즘은 수업을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죠. 대기자들도 많이 줄었어요. 서원을 처음 열었을 때는 제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이 300~400명씩 줄을 섰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로는 대기하는 학생이 별로 없어요. 지금처럼 국·영·수를 중시하는 교육 시스템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참고서 외에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전인 교육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에요.
이것이 현재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세대의 딜레마이자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부모 자신이 20대에 투사였고 민주화를 위해 피 흘렸던 사람이더라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아이가 지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별로 없다는 겁니다. 이런 변화 탓에 지난 2년은 힘든 날이 참 많았어요. 우리 사회의 천박한 교육 풍토가 다음 세대의 미래를 결정할 텐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우울하죠. 그래도 저는 낙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용기 내어 저항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유럽에 체류하고 있어서 ‘한국청년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유럽엔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내년 8월 서원 주최로 열릴 ‘2010 인디고 유스 북페어’를 준비하기 위해 서원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북페어에 이은 두번째 행사인데, 어떤 주제로 행사를 치를 것인지 고민하고 점검하자는 취지죠.

지난 1월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기점으로 이달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북미와 인도, 유럽의 학자들을 만났습니다. 정의나 평등, 자유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관념적 단어가 되어버린 가치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분들을 찾아가서 ‘가치를 다시 묻다’라는 주제로 인터뷰하는 거죠. 북미에선 노엄 촘스키 MIT 교수, 하워드 진 보스턴대 교수 등 갈망하고 존경하던 학자들을 만났어요. 지난 4월엔 ‘평등과 다양성’이란 주제를 갖고 인도를 방문해 정치학자 아슈스 난디 교수와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 등을 만났고요.

지난달 말 떠났던 유럽 여행에선 금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영국 리즈대학 교수 등 모두 11명의 학자를 인터뷰했습니다.”


-인디고 서원은 세계의 석학들을 직접 만나거나 원고를 받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섭외력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절대적으로 글의 힘이 크죠. 14세 때부터 제 수업을 듣기 시작해서 지금 대학원에 다니는 박용준 팀장이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문 편지를 잘 써요. 그 편지에 감동받아서 인터뷰를 수락하는 학자가 많아요. 지그문트 바우만도 연세가 84세이고 대단한 학자라서 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으로 와라, 질문지를 미리 보내라’라고 답장이 온 거예요. 그날 여기 친구들 좋아서 난리가 났어요(웃음).”


-다가올 새로운 5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데 북페어 외에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서원의 청소년들이 만드는 격월간지 ‘인디고잉(Indigo+ing)’이 이번에 18호를 내면서 발행한 지 만 3년이 됐어요. 4년차가 되는 인디고잉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하죠. 지금은 부산의 한 은행에서 지원금을 받고 있는데 이게 곧 끊겨요. 지원금이 없으면 책을 흑백 인쇄로 찍어야 할 텐데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어도 독자들이 계속 구독하도록 잡지의 질을 유지하는 게 목표입니다.

청소년들이 EBS 프로그램 ‘지식채널e’를 함께 보고 의견을 나누는 토론회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도 열심히 해야죠. 2007년 시작해서 지난해까지 부산에서만 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부산, 대구, 서울, 순천, 울산, 전주 등 6개 도시를 순회해요. 2010년엔 12개 도시로 늘리고 그 다음해에는 해외 도시로 범위를 확대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