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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산업'에 매몰된 언론계, 저널리즘이 언론 정책의 본질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금 언론계는 산업이라는 화두에 매몰되어 있다. 신문이 사양산업이라는 위기론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 방송조차 사양산업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이 상황을 더욱 산업 논리로 몰고 가는 정책과, 이에 부응하는 논리를 생산하는 집단들이 문제다.
 
 유럽은 매년 신문 지원 정책을 논하는 대규모 세미나를 열어 왔다. 왜 그럴까? 신문 산업이 망하면 한 나라의 경제가 붕괴할까? 아니다. 신문이라는 언론 매체의 쇠퇴가 민주주의 유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다. 그 나라 신문사주들도 경영적 판단을 우선할 것이다. 하지만 지원을 위한 사회적 논의는 단순한 산업 살리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수단으로서 신문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즉 올바른 저널리즘이 화두인 것이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신문의 방송진출을 더욱 열겠다고 했을 때 신문업계가 반대했던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히 신문기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신문답게 살 수 있는 지원 방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은 신문까지도 살 수 있는 즉, 다양한 여론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 지금 우리는 신문 살리기 명분으로 신문의 방송뉴스 진출이 가능하도록 입법을 강행했고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만 겪었다. 저널리즘의 강화를 명분으로 했던 2005년 신문법에 근거한 미약한 지원이나마 작년 미디어법 통과로 유명무실해졌다. 언론지원기관의 독립성은 사라지고, 시장경쟁력이 약하지만 다양한 여론을 전달하는 언론을 위해 필요한 지원은 큰 신문에 집중하고 있다. 대기업의 종편 또는 보도전문채널과 같은 방송뉴스 영역 진출로 저널리즘의 위기가 가시화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수신료 인상을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정책 논의가 저널리즘이 빠진 산업논리에 치중하다 보니 저널리즘의 현주소는 한심하다. 정권의 장악에 따른 KBS의 뉴스 시사보도에 대한 지적은 아예 논외로 하자. 이제 우리가 접하는 뉴스 중에는 기사의 기본도 안 된 것들이 많다. 기사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제목과 내용을 불일치시키는 것은 다반사다. 개그의 소재가 될 정도다.


 모 방송사에는 사주를 포함해 민원성 보도가 일상화 되어 있다는 기자들의 문제제기가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 관행이 정착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방송사만의 일일까? 오히려 기자들의 반성도 없는 대다수 언론들의 사주 관련 보도만 모아도 한 권의 교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독자들만 모를 뿐이지.

 타블로 학력 진위사건만 해도 그렇다. 학력 논란이 그렇게 인터넷을 달구었지만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언론의 노력은 거의 없었다. 만약 근거 없이 학력 논란을 제기했다면 문제이지만 문제 제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권리이다. 단지 이것이 혼란으로 가지 않으려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조직력을 가진 언론이 취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중계기에 불과했다. 오히려 논란을 소개만하면서 키우기만 했다.


 이런 와중에 천안함 언론검증위의 존재는 정말 신선하다. 일부 언론을 제외한 대다수의 언론이 정부 발표의 확성기 역할에 머무를 때 진실 확인이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준 저널리즘의 산 표본이다. 만에 하나 언론검증위의 결론이 틀렸다 해도 그들이 보여준 과학적 취재 태도는 저널리즘의 모범이다. 물론 그들의 존재가 그들이 속한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씁쓸할 뿐이다.


 이것이 저널리즘이 사라지고 산업논리만이 남은 현 언론정책이 만들어 내고 있는 현주소다. 저널리즘을 무시한 산업만 앞세우는 정부나 관련 기구는 정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최소한 뉴스를 다루는 언론 영역에서만이라도 저널리즘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산업을 고민하는 자세가 옳지 않을까? 저널리스트들도 이제 자신의 존재 이유가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저널리즘의 고양이 언론 정책의 본질임을 모두 인식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