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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시론]대선주자들, 공영방송의 독립을 선언하라

이탈리아의 공산당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약점 찾기에 골몰하고 있을 때 이들 사회의 강점에 주목했다. 선진자본주의 사회에는 국가영역 및 시장영역과 구별되는 학문과 교육영역, 언론, 문화부문, 사회적 회합과 토론의 영역 등 시민사회가 잘 발달되어 있다.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의 정치적 지배와 시장의 탐욕으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지켜주는 정신문화의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 다원주의와 관용을 포함한 민주적 가치들이 추구된다.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자본주의 지배의 상식화 기제’로 폄훼해 버렸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고도로 문명화된 영역인 시민사회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시민사회의 가치는 공공서비스방송으로서 공영방송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설정하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 간함과 커란, 머독 등 저명한 미디어학자들은 공영방송을 시민사회 커뮤니케이션의 중추로 상정한다. “공영방송은 국가권력과 시장으로부터 독립하여, 진실을 추구하고, 다원적이며 공정한 토론의 기회를 보장하고, 약자를 보호한다. 수준 높은 문화와 전통을 발전시키고 후속세대에 전수하며, 공동체의 민주적 가치를 지켜낸다.”

 

대표적 공영방송으로 손꼽히는 영국 BBC의 경우 시장의 압력과 이따금 발생하는 정치적 초당파성의 부분적 결여라는 문제가 BBC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BBC는 여전히 세계가 영국사회를 존중하도록 만드는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기구”라는 영국인들의 자부심에 근본적 변화는 없다.

 

(출처: 경향신문DB)

 

탄핵정국에서 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품격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사태’ 앞에, 문화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을 심지어 세계사에서 가장 문명화된 시위대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 같은 국민들의 모습과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것이 우리의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에 대해서는 “어째서 진실 앞에 종편을 따르지도 못하냐”는 탄식이 쏟아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부침이 심했던, 그리하여 국영인지 공영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이번 정권에서 보여준 모습은 상상 이상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후진적 영역 중 하나라는 정치영역, 그것도 과거 독재정권 수준으로 회귀해 버린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 현재의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이 독립하지 못하는 핵심적 이유로 거버넌스 구성방식의 문제가 제기된다. 사장 선임 시 여당과 야당이 각각 KBS는 7 대 4, MBC는 6 대 3으로 추천한 이사회에서 다수결로 결정하다보니 권력에 의해 장악된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특별다수제’이다. 여야 이사 추천비율을 7 대 6으로 하고 사장을 선임할 때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하자는 것이다. 입법과정에 있고, 필요한 일이다.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국가권력으로부터, 적어도 중립적인 사장을 선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을 개정하는 것만으로 공영방송을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제도가 규율하지만 사람이 공영방송의 철학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효과는 반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별다수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 NHK의 경우 아베 총리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경영위원회에 진입했다. 독일에서는 사장추천권을 갖는 방송위원회 구성에 정당의 사적인맥이 동원된 사례도 있다. 제도가 공영방송 독립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사람들의 행태는 충분조건이다. 여기서 정치인들의 공영방송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이다.

 

공영방송을 대선 승리의 전리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국회와 대통령이 행사하는 공영방송 거버넌스 구성권한은 주권자들인 국민들로부터 수탁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영방송의 철학과 가치를 진정으로 지켜낼 사람들을 추천하고 임명하며 이후에는 방송을 철저히 독립시켜야 한다. 이렇게 구성된 경영진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그들을 추천한 정당을 포함한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공영방송을 지켜내는 일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범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대선국면, 누군가는 정권교체를, 누군가는 시대교체를, 또 다른 누군가는 진정한 보수주의를 주창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대한민국을 세계로부터 존중받는 문화사회로 만들고 싶다면, 존중받는 공영방송을 만드는 일은 필수적이다. 대선주자들과 정치권이 응답할 때다. 우리 공영방송의 독립을 선언하고 실천하기 바란다.

 

한동섭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