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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용산참사 다섯 달… 매일 추모미사 봉헌 문정현 신부

ㆍ“이렇게 긴 喪이 어딨나, 초조와 분노로 견디고 있다”
ㆍ툭하면 잡아가고 영정 빼앗고… 인권은 대체 어디에 있나

문정현 신부(70)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의 참사 현장을 ‘남일당 성당’이라 불렀다. 남일당은 지난 1월20일 철거민 5명이 농성하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숨진 바로 그 건물 1층에 있었던 금은방 이름이다. 간판은 오래 전에 내려졌고 철거민 5명도 가고 없는 그 자리에서 문 신부는 매일 저녁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용산에 처음 들어온 것이 지난 3월28일이었으니 어느새 3개월째 현장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 신부는 유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3개월의 시간은 수고롭지 않다고 말한다. 유족들은 5개월을 견디고 있는 터다.

지난 20일은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다섯 달이 되는 날이었다. 유족들은 정부의 성의 있는 대처를 촉구하며 장례를 미루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미동도 없다. 정부가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는 경찰의 폭력이 전부다. 경찰은 5개월 추모제의 이튿날인 지난 21일 사제들이 단식 기도를 하고 있는 천막을 훼손하고 사제들의 연행을 시도했다. 경찰은 지난달 29일에도 명도 절차를 집행한다는 명분으로 문 신부를 비롯해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지난 17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문 신부를 만났다. 문 신부는 “정부가 용산 참사를 덮기 위해 공권력으로 유족들을 압박하고 있다”면서 “유족과 세입자들의 인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며 정부를 비판했다.



- 건강은 어떠십니까.
“피곤이 쉽게 와요. 경찰들과 몸싸움하면서 많이 다치기도 했고요. 어깨는 원래 아팠던 곳인데 여기 와서 경찰들한테 팔이 꺾이고 끌려 다니면서 다 망가졌어요.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수술하면 팔을 못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 지경이 됐습니다.”


- 거의 3개월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숙식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처음에는 꽃마차(잠을 잘 수 있도록 내부를 개조한 문 신부의 자동차)에서도 자고 여기 사람들이 마련한 ‘종교인의 집’이란 공간에서도 자다가 최근엔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갑니다. 손님방을 내줘서 잠은 편하게 자고 있어요. 아침에 밥도 얻어 먹고, 저한테는 호텔급이에요(웃음).”


- 남일당 건물로 들어오는 길에 보니 주변에 경찰이 꽤 많이 서 있던데. 온종일 이곳을 지켜보는 모양입니다.
“24시간을 저렇게 서 있어요. 우리쪽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고. 우리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집회신고를 하잖아요. 하지만 이곳은 경찰이 단 한 번도 집회신고를 받아준 일이 없어요. 법률상으로 신고제가 맞는데 실제 운영은 허가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경찰에서 신고를 안받아 주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경찰이 말하는 ‘불법 집회’를 하게 돼요. 그럼 경찰이 와서 잡아가는 거죠. 툭하면 잡아가요.

지금 바깥에 현수막이 걸려 있지만 이게 가능해진 것도 15, 16일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기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경찰이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어요. 압박이 워낙 심해요. 심지어 고인의 영정까지 빼앗아 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저도 오자마자 경찰과 싸움을 참 많이 했습니다.”


- 5월29일에도 경찰과 크게 충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명도 절차를 집행하겠다며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쳤다던데.
“29일 명도 절차를 밟는다는 소문을 그 전날 들었어요. 몇 시쯤 올지는 몰랐고. 저는 28일 밤 수도원에서 잠을 잤고, 29일 일찍 나온다고 해서 나온 게 오전 7시였어요. 7시25분쯤 문자 메시지가 왔는데 벌써 용역 100여명과 경찰들이 도착했다는 겁니다. 택시를 타고 급하게 왔더니 용역과 경찰이 현장을 둘러싸고 있더라고요. 그 안에선 이강서 신부님과 세입자 6명이 미사를 하고 있었고. 용역들이 명도 절차를 밟겠다고 해서 이 신부님이 ‘미사는 끝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냥 끌어내더라고요. 제가 그때 막 도착해서 안쪽으로 뚫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용역들한테 가로막혔죠. 양쪽 무릎이 깨지고 바닥에서 끌려 다녔어요. 이것을 말리려다가 이 신부님도 끌려 나왔고요. 상황 끝난 거죠. 물건을 다 실어 갔습니다.”


- 지난달 29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었던 날 아닙니까.
“국민장이었잖아요. 온 국민이 애도하면서 치르는 장례인데 어떻게 그런 날을 잡아서 그런 짓을 합니까. 비겁하고 치졸하지 않나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그랬어요. ‘오늘은 국민장 치르는 날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그래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여기 용산경찰서가 그런 곳이에요. 사실 저야 개인적으로 피해 보는 것 없잖아요. 유족들에게 보탬이 되려고 자발적으로 왔으니까 경찰한테 당해도 크게 상관 없지만 유족들이나 세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의 인권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 지난 20일은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5개월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족들이 많이 지쳤을텐데요.
“이렇게 긴 상(喪)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 안되는 얘기죠. 상을 치르는 사람은 또 얼마나 기진맥진하겠습니까. 유족들 얼굴을 한 번 보세요. 초조함과 분노로 5개월을 견디고 있어요.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한테 ‘용산 참사 현장에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이 ‘아직도 안끝났느냐’고 되물어요. 이런 사회가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참사 현장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시민들이 모르는 사회는 암울한 사회라고 봐야 해요. 그럼 그 5개월간 정부의 태도는 어땠느냐 하면, 모르쇠예요.”


- 이명박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시민들은 왜 무관심하다고 보십니까.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시기를 되짚어보면 멀게는 동학혁명, 3·1 운동이 있었고 4·19 혁명과 6·10 항쟁으로 이어지잖아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왔나 생각해 보면, 바로 죽음이고 희생이에요.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했을 때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큰 변화가 있었던 겁니다. 용산 참사 같은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이 사회가 조용한 것을 보면, ‘아직도 희생이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쉽게 말해서 (시민사회가 이명박 정부한테) 덜 당했다는 거죠.


- 시민들이 지금 각성하고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말씀이신데.
“그래도 저는 역사에 후퇴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불의가 길어질 수는 있어도 종국에는 망하는 게 불의예요.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이 있는 한 역사에 발전은 옵니다.”


- 지난 15일 사제 1178명이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용산에서 시국 미사를 열었습니다. 이번 움직임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을 넘어서서 한국 천주교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큽니다.
“제가 용산에 오고 열흘쯤 후였나. 이강서 신부님이 1주일 동안 피정(일상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며 지내는 것)을 하겠다며 이곳에 오셨어요. 이 신부님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이에요. 이건 한국 천주교의 공식 기구입니다(사제단은 비공식 조직이다). 이 신부님이 8일을 지내더니 ‘떠날 수가 없다’고 해요. ‘용산 참사는 바로 우리 교회의 일’이라는 거죠. 그래서 주교님한테 경과를 보고한 뒤 허락을 받고 이곳에 상주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이 신부님한테 ‘남일당 성당’ 주임신부 자리를 내드렸어요. 이강서 주임신부, 문정현 보좌신부인 거죠(웃음).”


- 그간 서울대교구는 시국 사건에 대해 사제단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번엔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신부님이 담당 주교님한테 계속 보고를 해서 김운회 주교님도 지난 3일 여기 와서 유족들을 만나셨어요. 금일봉도 주시고. 지금 서울대교구에서는 유족 다섯 분에게 각각 월 150만원씩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족은 물론이고 저희들한테도 큰 위로가 되죠.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하다시피 하며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정진석 추기경님도 김 주교님을 통해서 ‘용산 참사에 대해 알고 있다, 기도하고 있다’는 말씀을 전하셨고요.”


-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약 한 달 후인 2월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그 추모 열기에 용산 참사가 시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용산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천주교가 이명박 정부를 도왔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요.
“제가 용산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가 김수환 추기경님 때문입니다. 김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시면서 용산 참사가 묻혀버렸잖아요. 김 추기경님이 살아 계셨으면 여기에 다녀갔을 법한 분인데, 그분이 이것을 다 똘똘 말아서 가지고 올라가시나…. 그래서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용산에 들어오기로 작심을 한 거죠.

처음엔 이렇게 길게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예수부활대축일인 4월12일까지만 있자고 했는데, 4월12일이 금방 오더라고요.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유족들이나 쫓겨난 세입자들이 저한테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더라고요.”




평범했던 신부, 인혁당 사건 계기로 반정부 투사 변신

- 문 신부는 사제단이 창설되던 1974년부터 사제단 활동을 함께 하셨습니다. 현재 사제단의 후배 신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요. 아직도 제가 선봉에 서 있는 것을 보세요. ‘이런 때에 사제단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실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하지만 기대가 더 큽니다. 훨씬 크죠. 사제단이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적인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단은 그 엄혹한 70년대에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가 한국 천주교회입니다. 군사 독재로 얼어붙은 시대에 이런 순교 정신으로 불의에 항거하다가 희생되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죠. 이런 정신이 사제단의 유산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용산 참사가 터진 후에도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백 명의 사제들이 지금 가장 고통받는 곳, 용산에 모였어요. 대단한 일 아닙니까. 물론 사제단은 이 사회 안에서 일부에 불과해요. 교수들도 있고 다른 종교도 있고 환경 운동가, 노동 운동가들도 있죠. 하지만 순교자의 마음으로 앞장서서 몸을 던지면 사제단이 이 암울한 시대에 횃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 함세웅 신부, 송기인 신부 등 사제단 창립 멤버 중 일부는 공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 신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어떤 성격의 정부가 들어서든 관계없이 항상 ‘길 위의 신부’였습니다.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맡아 달라는 얘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 때도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30년 동안 권력이나 관(官)에 가까이 가본 일이 없어요.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받는 곳에 언제라도 참여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저의 영성이고 정체성인 거죠. 관에 들락날락하기 시작하면 소외된 곳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떤 권력이든 길어봐야 5년이에요. (관직을 맡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스스로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밑지는 짓을 왜 합니까.”


- 동생인 문규현 신부도 길 위의 싸움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분인데, 자주 만나십니까.
“현장에서 많이 보죠. 어제(16일)도 여기 왔다 갔어요.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가 공교롭게도 제가 용산에 들어온 3월28일부터 오체투지 순례를 시작했잖아요. 순례단한테 ‘서울에 들어오면 용산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순례단이 용산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음날 용산에서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용산에 오긴 왔죠. 분향하고 108배도 했지만 제 욕심에는 순례단이 유족들과 더 오래 있어주기를 바랐으니까. 그런데 그게 안되니까 속이 상해서 순례단이 용산 지나가는 날은 온종일 울었어요.”


- 어쩌면 두 형제가 이렇게 하나같이 힘들게 사십니까.
“부모님의 영향인 거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신학교에서 배운 건 별로 기억에 없어요. 진짜 수련은 부모님한테서 받았죠. 저희 아버지는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분이었어요. 고지식한 분이었지만 없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는 한없이 따뜻하셨어요. 저희 동네에 저희 어머니, 아버지 손을 거치지 않은 시신이 별로 없었을 거예요. 누가 상을 당하면 시신을 거두고 장례 치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까. 땅 한 평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 없지만,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가르침을 자식들한테 주신 거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커져요.”


- 문 신부는 경기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대형 사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추리가 문 신부의 마지막 싸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추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뱉어 놓은 말 때문에 그래요. 대추리는 너무 처절한 곳이기 때문에 ‘이들을 놓고 절대로 대추리에서 내 발로는 기어나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발로 기어나왔잖아요.

변명을 하자면 행정대집행, 그러니까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2006년 5월4일 군·경찰 1만4000여명이 대추리에서 벌였던 강제퇴거 작전) 이후 주민들이 기가 완전히 죽었어요. 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이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된 거죠. 운동을 이끌던 지도자들도 ‘항거해야 한다’는 쪽과 ‘주민들만큼밖에 싸울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었어요. 너무 괴로워서 몇날 며칠을 술로 살았어요. 하지만 저도 기력이 다한 주민들에게 ‘계속 싸우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대추리에서 모두 나가는 것을 보고 2007년 4월 저도 나왔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보지도 않던 붓글씨를 쓰고 온종일 밭을 파고 그랬지요.”


- 70년대부터 30년이 넘도록 정부를 상대로 싸웠지만 이겨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긴 적이 거의 없죠. 그러다보니 공식이 하나 생겼는데, 이기기 위한 싸움은 저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그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는 거예요. 천국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면서 노력하다 죽는 것으로도 족해요. 동료들과 어깨동무하고 같이 걷다보면 잠시나마 희망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더 나은 세상을 나 혼자 앞당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변화를 나 혼자 힘으로 만든다? 이건 웃기는 얘기죠.”


- 2008년 1월 장애 아동들의 보금자리인 ‘작은 자매의 집’ 원장직을 은퇴하셨습니다. 22년간 원장을 지냈던 곳인데 은퇴 이후 종종 들르십니까.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의 정 때문에…. 처음엔 은퇴식을 하지 않고 몸만 빠져 나오려고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은퇴식을 했는데 미사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러니 그 근처도 가면 안될 것 같아요. 아이들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고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또 지금 거기서 사람들이 좋은 일 하고 있는데 전임 원장이 들락날락하면 안될 것 같아서 아예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은퇴 이후엔 어디서 지내셨습니까.
“제가 97년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시작한 곳이 전북 군산이에요. 은퇴하고 나서 터전을 어디서 잡을까 궁리하다가 군산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보상금 받은 게 5500만원이더라고요(웃음). 그 돈으로 집 한 칸 마련하고 동지들 3명 합해서 네 식구가 같이 살다가 용산에 온 거죠. 밖에 나와 있으니까 집에 가보고 싶기도 한데 용산에 들어온 후로는 두 번밖에 못 갔어요.”


- 그 두 번은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대추리를 떠나는 주민들이 짐승을 버리고 갔어요. 그럼 그 놈들이 들개가 된다고. 대추리에서 5마리를 키웠는데 한 마리는 주민들이 잡아 먹었고 한 마리는 도저히 잡히지가 않아요. 그래서 세 마리만 제가 데리고 나왔는데 그것들은 다 죽었죠. 지금은 그 새끼 한 마리가 남아 있는데 그 놈이 그렇게 보고 싶어요(웃음). 텃밭이 한 70평 되는데 텃밭이 어떻게 됐나도 보고 싶고요.”


- 용산 문제가 하루 속히 해결돼야 집으로 돌아가실텐데요.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장례를 치를 수 있느냐는 정부의 태도에 달려있어요. 그런데 정부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장례 날짜가 불확실한 거죠.”


- 지금으로선 언제쯤 용산을 떠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군요.
“그래도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예상치 못한 큰 변화가 오는 때가 있었어요. 가령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이 타올랐을 때를 생각해봐요.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잖아요. 이런 일이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몇 번은 봤다는 얘기입니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10년에 한 번씩은 모두가 놀라는 변화가 있었어요. 지금 그 변화가 올 때가 됐는데 안오니까 답답하다는 거죠. 용산 문제가 얼른 해결이 돼야 할텐데…. 하지만 그 날과 시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문정현은 누구인가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는 1940년 전북 익산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66년 사제 서품을 받은 문 신부는 74년 초까지 ‘평범한’ 신부로 신앙생활을 했으나 그 해 인혁당 사건을 알게 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동참, 반정부 투사로 변신했다.

76년 동료 성직자 및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해(이른바 ‘명동 사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8년부터는 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89년 임수경씨가 방북할 당시 친동생인 문규현 신부를 동행하게 했던 것도 그였다.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 개정 운동,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 등 반미 운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2007년엔 4·19 혁명 47주년을 맞아 ‘4월 혁명상’을 수상했고, 2002년 전국의 시민운동가 200명이 뽑은 ‘올해의 시민운동가’상을 받았다. 하지만 문 신부가 무서운 ‘싸움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86년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보육시설 ‘작은 자매의 집’을 설립, 22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장애아를 돌봤다. 문 신부는 2008년 1월 ‘작은 자매의 집’ 원장직을 은퇴했으며 지난 3월부터 용산 참사 현장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