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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기자칼럼]미디어에 속지 않는 법

한국갤럽이 24일 발표한 대선후보지지도 조사(4주차)에서 문재인의 호남 지지율은 전주에 비해 14%포인트 떨어졌다. 같은 날 나온 리얼미터 조사에선 전주보다 6%포인트 올랐다. 3·4주차 사이 호남 지지도에 영향을 끼친 변수는 문재인의 ‘전두환 표창’ 발언과 오거돈의 ‘부산 대통령’ 발언이다. 온라인에서 한쪽은 발언들이 호남 민심을 실망시켜 하락했다고 분석하고, 다른 한쪽에선 위기감을 느낀 지지자들이 결집해 상승했다고 해석한다.

 

선거 때면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문재인의 호남 지지도 변화처럼 서로 어긋난 정보와 해석으로 혼란을 주기도 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아니, 무엇에 속지 않을 것인가?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이 4·13 총선 때 새누리당이 160석 이상을 확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확실히 틀렸지만 여론조사기관은 계속 조사하고 발표한다. 언론은 여론조사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받아쓰고 퍼뜨린다. 여론조사는 참고용으로 봐야 한다. 표본과 설문항목, 응답률을 확인하는 게 중심을 잡는 방법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미디어의 정보 가공은 간혹 왜곡을 유발한다. 어느 방송사가 지지도를 막대그래프로 내보냈는데, 1·2위 간과 2·3위 간 격차는 10%포인트 안팎인데도 그래픽에선 2·3위 간 막대 길이 차가 1·2위보다 두 배가량 길었다. 의도인지 무지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픽은 양강 구도를 강조한 모양새가 됐다.

 

팩트 체크를 교차 확인하면 좀 더 제대로 된 정보에 다가갈 수 있다. 다만, 팩트 체크 자체가 의제 설정 기능을 한다. 의혹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기도 한다. 대변인 노릇을 하는 팩트 체크도 종종 나온다.

 

편집·기사도 유심히 봐야 한다. 언론은 매체의 물리·공간적 한계 때문에 편집을 할 수밖에 없다. 편집은 사실 너머 진실에 도달하려 노력하는데, 때로 그 목표를 성취하지만, 때로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 “전두환 장군에게 받았다”와 “반란군 우두머리인 전두환 여단장에게 받았다”는 제목은 어감도 전달 내용도 다르다. 비판하든, 옹호하든 발언 전체를 두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전문(全文)의 중요성은 연설과 정책에서 두드러진다. 이를 따져보려면 품을 들일 수밖에 없다. 유의할 건 ‘환호 유발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문구들을 사용함으로써 즉각적인 호응을 유도하는 말들”이다(<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소피 마제·뿌리와 이파리). ‘민주공화국’ ‘적폐청산’ ‘개혁’ ‘법 앞의 평등’ 같은 말들이 해당된다. 아름다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설·인터뷰, 공약에 들어 있다.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한다면 박근혜·이재용의 구속을 말하는지 따져야 한다.

 

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완곡어법과 아리송한 표현으로 상대를 속이는 ‘정치적 언어’를 지적한 말이다. 대량해고를 구조조정이라 부르는 게 일례다. 기득권 봐주기나 무분별 영입이 통합·화합 같은 말에 숨어 있을 수 있다.

 

박근혜를 탄핵했다고 ‘헬조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무너진 민주주의가 당장 바로 서는 것도 아니다. 촛불의 개혁의제는 도돌이표다. 정권교체가 되어도 실현시키려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필리버스터까지 하며 테러방지법을 반대한 야권은 총선에 이기고도 개정·폐지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12월에야 폐지 법안 하나가 발의됐다. 선거는 ‘잘못 대의할’ 지배층을 선택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럼에도 선거는 시민이 가진 유일한 제도적 무기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주아리는 “투표하는 나라에서 시민은 사유·토론하고, 읽고, 분석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의무를 지는 건 피곤한 일이다. 미완의 촛불혁명을 완성으로 이루는 길에 시민이 감당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모바일팀 김종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