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4차 산업혁명’ 구호는 버려야

곧 새 정부가 들어선다. 탄핵정국도 일단 끝난다. 청와대가 비고 장관이 놀고 있으니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농담도 내일까지다. 새 정부는 할 일이 많다. 축하할 시간도 없이 통치에 나서야 한다. 인수받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실전이다. 따라서 어차피 정신도 별로 없겠지만, 이 한마디는 꼭 전하고 싶다. 제발 ‘4차 산업혁명’이란 구호를 버려 달라.

 

나도 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상징적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상징 중에서도 악명 높은, 이른바 ‘플레이스홀더’에 해당한다. 소통학자 카우퍼와 칼리에 따르면, 플레이스홀더란 많은 것을 지칭하고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합의 수준은 낮은 상징적 기호이다. 모두가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은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전문가들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다른 용어를 쓰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대안이 없으니 일단 쓰고 보자는 분위기도 있다. 인공지능, 로보틱스, 사물인터넷, 플랫폼 경제, 자동화, 신소재 등 기술적 혁신과 그에 따른 사회적 전환을 하나로 묶어 부를 만한 용어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의미론적 혼란도 문제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째, 성찰이 없다. 4차 산업혁명 담론에는 우리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기술정책에 대한 반성의 담론이 없다. 따라서 왜 4차 산업혁명을 해야 하는지, 할 수는 있는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변이 없다. 그저 남이 설정한 비전을 따라, 남이 설정한 개념을 이용해서, 남들이 계획한 일을 나도 한 번 잘해 보겠다는 식이다. 자기주도성이 없다. 이 때문에 ‘혁명’이란 표현이 특히 거슬린다. 세상에 스스로 성찰해서 결단하지 않는 혁명도 있단 말인가.

 

둘째, 편향적이다. 적어도 지금 돌아다니는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산업편향적이며 생산편향적이다. 4차 산업혁명 담론을 따라가 보면 ‘기술혁신으로 산업 경쟁력을 발전시키자’는 쌍팔년도식 구호를 만난다. 여기에 ‘뒤처지면 죽는다’는 우리 특유의 조급증을 더했다. 편향을 넘어 시대착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애초에 클라우스 슈바프가 제시한 비전을 읽어보면, 기술혁신으로 인해 산업의 구조적 재편성을 넘어선 사회적 변화를 예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생활세계의 거래 양식 자체가 변한다고 한다. 새로운 계층과의 연결성이 등장한다고 한다. 생산의 기초인 작업장의 개념이 바뀌는 것은 물론 노동력의 원천이요, 저수지라 할 수 있는 가족과 학교가 변화한다. 이를 산업과 생산의 관점에 한정해서 논의하는 일은 협소하다.

 

셋째, 나쁜 구획 짓기가 만연하다. 벌써 어떤 분야가 4차 산업혁명에 해당하고, 어떤 분야는 아닌지 확인하는 일이 한창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위원회를 구성하고, 센터를 짓고, 국가예산을 나눌 것을 예상해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대로 가면 어떤 일이 전개될지 뻔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제목을 내걸고 정부예산을 확보한 후, 사업기간이 만료하는 날까지 예산소진에 매진하는 ‘국가예산 사업자들’이 창궐할 것이다.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국가주도적 기획과 전략적 줄세우기가 반복된다.

 

산업부문은 물론 국가적 수준에서도 구획 짓기가 무력화된다는 것이 슈바프가 애초에 제시했던 요점이었다. 그는 모든 생산과 소비, 유통과 서비스가 지능적으로 연결되면서 지금까지 없던 방식의 사회적 효과가 발생하리라 예상해서 ‘혁명’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기술주도적 연결성이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넘어 사회를 재조직화하는 ‘체계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에 구획 짓기가 들어설 영역은 없다.

 

나라면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공장의 종말’ 또는 ‘직장의 종말’이라 부르고 싶다. 산업사회의 생산 단위인 공장과 직장이 해체하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말이 갖는 부정적 함의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들에게는 ‘초연결사회의 도래’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고 싶다. 인공지능의 주도성을 고려해서 ‘다중지능사회’ 또는 ‘지능정보사회’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그러나 결코 하나의 용어일 수 없다. 단일한 기획이나 전략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부터 서비스 제공 사업자까지 무수한 단위와 수준에서 기술과 사회의 공진화가 이루어지는데, 국가가 주도해서 일목요연하고 일사불란한 전략적 대응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실패다. 따라서 구호도 하나일 수 없다. 각자 자신의 입지에서 돌아다니는 과녁을 찾아내 맞히려 노력해야 한다. 무수한 화살 중에 몇 개가 적중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빗맞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을 날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