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성폭력 보도 관행의 문제점

최근 한샘 기업 내에서 벌어진 권력형 성폭력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된 바 있다. 관련 언론 보도들을 보면, 성폭력 범죄 관련 보도 방식에 어느 정도 진전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문제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직장 내 성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 차원에서 사건을 다루는 언론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대표적인 것이 진실 공방이라는 방패하에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강화할 수 있는 보도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들이다. 피해자의 말에만 물음표를 붙여 기사 제목이나 리드를 작성한다거나 가해자의 말을 해명이라고 프레이밍해주는 것이다. 사건을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의 행위를 중심으로 재연하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 역시 반복되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10여개 시민단체들이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여성에겐 모든 기업이 한샘이다’를 주제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대기업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기업 내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가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배제하고 성적 대상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상훈 기자

 

가해자나 피해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언론의 불편부당성 측면에서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제목이나 표현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편견들을 강화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언론은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성폭력 범죄는 증명이 어렵고, 목격자가 존재하기 어려우며, 사회적 통념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피해자가 보호받는 것이 다른 범죄에 비해 어렵다. 우리나라는 1995년까지도 성폭력 범죄를 ‘정조에 관한 죄’라는 범주 안에 두고 사고해왔던 문화적 배경이 있다.

 

20여년이 지났지만 사회적 성인지 감수성 수준이나 성폭력 범죄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공권력에 신고하는 것도, 직장에서 성폭력 범죄에 대응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성희롱 문제제기에 대한 불이익조치’ 중 기소된 사건은 2건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직장 내 성폭력, 성희롱 피해자가 이 피해를 신고하여 적절한 법적 조치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경찰과 사법 시스템에서 강간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사건에 대한 판단 근거로 사용해 왔다는 점 역시 중요한 비판 지점이다.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법이 2010년부터 적용되고 있지만 성폭력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하기보다는 피해자의 저항 여부나 피해자의 ‘여지’라는 남성 중심적 관점에 기초하여 사건을 판단하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들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해자의 말, 특히 호감이 있었다거나 동의가 있었다는 주장을 진실 공방 등의 형태로 부각시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면 결국 피해자의 의사에 반했는가가 핵심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사법 시스템도, 대중들도 피해자의 의사를 판단함에 있어 피해자의 의사, 다시 말해 피해자의 증언이나 말은 의심하면서 그 의사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에 대한 편견에 따라 판단하는 형국이다. 불쌍한 ‘진짜’ 성폭력 피해자가 있다는 믿음들이 존재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 친밀한 관계가 없었던 사이여야 한다거나,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후 대화를 멈추지 않은 것이 사실상 동의, 더 나아가 애정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라거나, 신체적 상해가 규명되어야 한다거나, 피해자가 침착하거나 평온해 보이면 이상한 일이라거나, 진술은 일관적이어야 하며, 취한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직장 내 위계 관계 속에서 약자에게 자행되는 성폭력처럼 저항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 신고하더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 등에 대해서는 꽃뱀이라는 낙인찍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성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다는 의미로 쓰이던 꽃뱀이란 어휘는 현재는 남성이 여성이 동의했다고 자신은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말이 있을 때 이 여성을 비난하기 위한 언술로 사용되고 있다. 설사 성행위의 순간에서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다면 그것은 자기결정권을 무시한 것임에도, 피해자의 의사를 피해자의 입장보다 가해자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더 나아가 왜 ‘오해’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기자협회는 성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에서 이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한 보도 방향을 제시하고, 성범죄 보도에 대한 신중함을 당부하고 있다. 총강에서는 “언론은 성범죄를 사회적 성역할에 관한 잘못된 통념에 기초해 피해자의 도적 관념과 처신의 문제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보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실천요강에서는 “가해자 중심적 성 관념에 입각한 용어(중략)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진실공방 프레임으로 해당 사건을 다루면서 가해자 중심적 성 관념을 해명이라는 말로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해 주는 보도, 그리고 남성 행위자 중심으로 사건을 재연하는 이미지를 사용한 몇몇 방송들은 성범죄 보도 기준에 맞추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 중 하나는 차별을 공고화하는 사회적 편견의 재생산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성범죄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접근하면서 한 걸음 더 보도의 신중성을 기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