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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우연’은 ‘순수’를 전제로 한다

학창시절 공부의 훼방꾼은 신필이라 불리는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였습니다. 고수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은 어릴 적 험한 환경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모험을 겪다 문파를 넘나드는 무공을 전수받고 영웅이 되어가는, 신화의 전형과 같은 이야기는 입시를 잊게 만드는 달콤한 마약이었습니다. 


이야기 속 초인이 되기 전 주인공이 겪는 위험은 언제나 고수들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타개되어집니다. 30년의 약속 정도는 우습게 하는 무도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딱 필요한 순간에 그 넓은 중원에서 만날 수 있는지 의심하기보다는 그러한 행운이 내 인생에도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했던 사춘기 시절입니다. 


우연히 내가 베푼 작은 선의에 훨씬 더 큰 보상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은 은혜 갚은 까치와 박씨를 물고 온 제비를 넘어 면접일 늦은 와중에도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자 면접장에 회장님으로 나타나는 트렌디 드라마의 익숙한 설정으로 이어집니다. 


현실에서도 패스트푸드점의 알바생이 유명해져 연예인이 되었다거나 친구 따라 오디션장에 갔다가 뽑혔다는 스타들의 데뷔담들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2015년 당시 5000만명의 팔로워를 가진 저스틴 비버가 궁금하다며 올린 사진 한 장으로 유명해져 모델이 된 스페인의 신디 킴벌리처럼 하룻밤 만에 신데렐라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시급 4달러의 베이비시터 일을 하던 일반인이 무도회장에서 유리구두를 남기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500만의 팔로워를 지닌 유명인이 된 것이죠.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업무 중에도 미담이나 열녀 효자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 순수하고 착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군주가 마땅히 알아보고 보상하는 바른 사회라 믿고 싶어하는 것이죠. 


이제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인구수보다 많은 핸드폰의 고성능 카메라가 강남역에서 노숙자에게 빵을 먹여주던 “천사의 손”과 같은 우연의 채록이 손쉬워진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방송사에는 블랙박스 영상들이 제보되고 교통시비에서 행패를 벌인 사람에 대해 구속수사를 요구하는 청원이 수십만의 제청을 받는 것 역시 현장에서 녹화된 동영상에 기초합니다. 말하자면 현실세계의 절대 빌런을 보는 듯하기에 팍팍한 세상에서 마음 놓고 비난할 수 있는 실제적 대상을 만난 군중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연은 순수성을 기초로 합니다. 만약 기획사가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연습생이 편의점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며 일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선거 기간에 시장통을 돌며 달동네에 연탄을 나르는 정치인의 모습 역시 의도된 연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성철의 책 <우연의 역사>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이란 가능한 것, 또는 저절로 일어난 일로서 일종의 능력으로 보았다 합니다. 진화생물학자 조지프 손튼은 5억년 전의 고대 단백질 유전체 변이 연구를 통해 진화의 과정 또한 최적의 결과가 남는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임을 밝혔습니다. 네트워크 과학자 앨버트 바라바시 역시 그의 책 <성공의 공식 포뮬러>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갖춘 사람들 사이의 변별력은 그리 크지 않으므로 나머지는 운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우연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가 되기 때문에 매일의 출근이 힘든 갑남을녀들이 드라마 속 행운의 스토리에 매료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월요일 아침에 사놓은 로또가 주중의 스트레스를 견디도록 해 주는 부적과 같으며 일요일에 그것이 맞으면 가차없이 그만두겠다는 염원 또한 수백만분의 일에 불과한 우연의 행운에 지친 마음을 조금은 기대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긴 탄생의 과정에서도 수억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났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 속에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도 우연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우연의 전제인 순수는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꺼진 곳에서 출발하기에, 작은 행운이라도 기대하려면 다친 제비를 모른 체하지 않았던 흥부와 같이 늘 착하게 사는 방법밖엔 없으리라 믿는 소시민입니다.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