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에 있는 호텔에서 세미나를 연다길래, 하필 국제공항 근처에서 만날까라고 생각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아니 공항 옆이 안전하다 뭐 그런 건가 싶었다. 호텔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안 보여 일단 안심이었지만, 로비에서 안내하는 관리인에게 기어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관광객은 별로 없는 호텔인가 봐요.


내가 혹시 영화 <부산행>에 나온 김의성처럼 보였을까. 불안한 미소를 가진 호텔 관리인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후, 소리를 낮추어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수치심도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 짧은 대화의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는지 서로에게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행이다.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믿기 어려운 소문들이 돌아다닌다. 중국의 한 연구소가 기획해서 퍼뜨린 바이러스라느니, 외국의 확진환자가 한국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입국한다느니, 정부가 특정 지역을 홀대해서 방역시설로 지정했다느니, 방역당국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고 있다느니 하는 말들이다. 


이런 소문을 낭설이라 치부할 수만 없는 이유가 있다. 소문을 전할 때마다 일종의 책임전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문제고, 내 편이 아니라 네 쪽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마치 이런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면, 자신은 전염의 죄악에서 멀어져서, 감염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고통마저 부당한 감내가 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재난 속에서 책임이 없다고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재앙이 편을 갈라서 다른 속도로 닥치지 않는다. 실은 편을 갈라 비난하는 일 자체가 의미 없는 상황이 재난이다. 세속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좀비’ 드라마가 거룩한 종교의 묵시록과 더불어 한목소리로 가르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재난이란 곧 네 이웃의 고난이 너의 고난인 경우다. 


신종 코로나에 대한 낭설을 ‘가짜뉴스’라며 처벌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소문의 형식이 문제는 아니다. 소문은 교류매체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주고받는 진정한 안부 속에 있다. 뉴스에서 확인한 정보의 정확성을 따져보는 질문과 대답 속에 있다. 실은 어엿한 언론사가 만든 뉴스와 논설 속에도 있다.


이런 소문을 놓고 ‘가짜뉴스’라고 불러봐야 입만 아프다. ‘가짜뉴스’라고 찍어서 처벌하자고 윽박질러 봐야 소용도 없다. 이렇게 비난할 시간이 있으면 감염경로는 무엇인지, 치사율은 얼마인지, 발병에 취약한 사람은 누구인지 확인해서, 이해하기 쉽게 가공해서 전파하는 편이 좋다. 이렇게 공들여 전파하는 소식이 다른 누구에게 ‘가짜뉴스’로 찍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열심히 하면 더욱 좋다. 


낭설이 외국인 혐오를 전파하기에 문제라고 꾸짖는 이들도 있다. 마치 이방인에 대한 혐오를 꾸짖어서 없앨 수 있다는 듯 말이다. 혐오를 혐오한다는 고백도 있다. 마치 뒤의 혐오가 앞의 것보다 숭고하다는 듯 말이다. 


재난 중 사람의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이 이는 만큼 혐오와 증오가 발생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정서적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다. 왜냐하면 정서란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인간의 이유 있는 마음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란 누군가 ‘두려워 말라’ 또는 ‘미워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불편한 마음의 동요가 발생하는 이유를 확인해서 대처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재난 중 언론이 특별히 주의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시민들이 느끼는 염려와 두려움, 혐오와 증오의 이유를 밝혀서 스스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다. 동료 시민에게 윽박지르고, 편 갈라 싸움을 일으키고, 저만 살겠다고 외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부산행> 김의성 같은 자 말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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