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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정동길에서]유통공룡의 위기

권력이 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넘어간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앨빈 토플러(1928~2016)에 따르면 발단은 제품에 붙은 막대 모양의 검고 흰 줄무늬(바코드)였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슈퍼마켓 업자들은 식료품 제조사와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최고의 컴퓨터업체 IBM과 회의를 열었다.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고객의 줄을 짧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결론은 상품을 코드화하고 컴퓨터가 이를 자동으로 읽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국 제품 코드’라 불리는 바코드가 등장했다. 


바코드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점원의 계산 실수가 사라지고 고객이 계산대 앞에 머무르는 시간도 단축됐다. 하지만 정작 바코드의 가공할 위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즈음 미국의 평균적인 슈퍼마켓은 2만2000종의 제품을 팔았다. 슈퍼마켓 사장들은 그동안 ‘감’에 의존해 영업해왔는데 바코드 덕에 각 제품의 단가와 판매량, 재고량, 수익률 등은 물론이고 진열장 어느 곳에 빈 공간이 생겼는지까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바코드의 효용을 간파한 슈퍼마켓의 첫번째 요구는 제조업체에 상품의 바코드를 또렷하게 인쇄해 달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슈퍼마켓에는 고객의 빅데이터가 쌓였다. 슈퍼마켓 사장들은 아이디어가 많아졌고, 제조업체에 훈수를 두기도 했다. 그렇게 유통업체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당시 미국에서 네번째로 큰 체인점이던 월마트는 제조업체와 중간 대리상에 최초로 ‘갑질’을 했다. 납품업체에 제품의 수량·규격·모델은 물론이고 포장지 색상까지 직접 주문했다. 제품 배송도 자신의 일정에 맞춰줄 것을 요구했다. 주문과 인도 조건을 정확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배상을 요구했다. 제조업체는 속수무책이었다. 월마트 등 유통업체는 소비자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마침내 산업혁명 이후 지속되던 제조업의 시대가 저물고 유통업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분당·일산 등 신도시에 들어서기 시작한 대형 유통업체의 기세는 엄청났다. 대기업 가전업체들조차도 유통업체가 요구하는 조건대로 제품을 만들어야 했다. 중소기업들은 대형 마트의 하청업체나 다름없었다. 단가 인하는 물론이고 판촉사원 파견 등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대형 마트가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고용 창출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그늘도 짙었다. 순대와 통닭까지 팔면서 골목상권은 쑥대밭이 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가 등장한 배경이었다.


정보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그 유통공룡들이 요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롯데쇼핑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구조조정에 나선다고 한다. 향후 5년 동안 수익성이 떨어지는 오프라인 점포를 약 30%(200여개) 정리하기로 했다. 이마트는 작년 2분기 사상 처음으로 분기 영업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4분기에도 1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유통공룡의 위기는 경제민주화나 정부규제 때문이 아니라 온라인 쇼핑몰과의 경쟁에서 밀린 탓이다. 정보의 흐름이 바뀌면서 유통 생태계가 달라졌지만 기득권을 가진 대형 오프라인 마트들은 변화에 미온적이었다. 디지털시대의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와 소비자의 합성어로 생산에 참여하는 소비자라는 뜻)는 아날로그 때보다 더 적극적이다. 소비자들은 온라인 쇼핑몰에 깨알 후기를 남기면서 판매 업체에 대한 평판과 제품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한다. 이런 내용은 제조업체에도 전달되고 판촉에 신속하게 반영된다. 게다가 업체들은 첨단 물류시스템을 이용해 새벽배송 같은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돈과 시간을 절약하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온라인 쇼핑몰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유통은 단순히 물건을 싣고 가서

선반에 올려놓는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

정보를 주고받는 시스템이다



유통은 단순히 공장에서 물건을 싣고 가서 가게 선반에 올려놓는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 정보를 주고받는 시스템이다. 온라인 쇼핑몰은 빅데이터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생산·소비자 간 커뮤니케이션의 질을 높여 과거 미국의 슈퍼마켓처럼 유통을 혁신했다. 1990년 토플러는 그의 저서 <권력이동>에 이렇게 적었다. “소비자로부터 나오는 데이터가 재화 및 서비스의 설계·생산·유통 과정에서 날로 더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자는 생산공정에 기여하도록 되어가고 있다. 소비자는 자기가 구매하는 물건의 공동 생산자인 셈이다.” 상품을 생산·유통하는 기업가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경구(警句)이다.


<오창민 디지털뉴스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