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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은 끝나지 않았다 내 영화의 주인공들이 숨쉬고 있기에”

<독립다큐 ‘살기 위하여’ 감독 이강길>

ㆍ10년째 부안 계화리 드나들며 새만금 기록
ㆍ“이겼다 졌다 아닌 싸움의 본질 들여다봐야”

다큐멘터리는 소재가 시의적절할 때 호소력이 있다. 완성된 지 3년 만에 극장에서 상영되는 독립 다큐멘터리 <살기 위하여>는 개봉 시기만 보자면 때가 늦어도 이만저만 늦은 게 아니다.

지난 16일 개봉한 <살기 위하여>는 이강길 감독(42)이 2000~2006년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어민들의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투쟁을 담은 작품이다. 대법원은 2006년 3월16일 ‘새만금 간척사업을 계속 추진하라’고 판결했고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는 같은 해 4월21일 완공됐다. 새만금 개발은 갯벌 어민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제 손써 볼 도리가 없는 사업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감독의 말대로 “우리가 새만금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대운하 같은 거대한 국책사업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 다시 펼쳐보는 일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의 작업실에서 이 감독을 만났다. 이 감독은 2000년 부안을 처음 찾은 이래로 현재까지 햇수로 10년째 계화리를 드나들며 새만금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과 바다 생명이 그곳에 남아 있는 한 새만금은 진행형”이라며 “질 때 지더라도 나 스스로가 후회하지 않는 싸움을 끝까지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2006년인데 개봉이 왜 3년이나 늦어졌습니까.

“그게 독립영화와 독립다큐의 현실이에요. <워낭소리>가 잘된 이후 독립영화에 관심을 갖는 분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이 극장에 걸리지 않습니다. <살기 위하여>를 비롯해서 <워낭소리> <할매꽃> 같은 작품들은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개봉 지원을 받기로 하고 시작된 프로젝트였어요. 그 덕분에 3년이 지났지만 개봉을 하게 된 겁니다.”

-2000년 새만금을 처음 방문했는데, 어떤 계기로 새만금과 인연을 맺게 된 건가요.

“당시 제가 속했던 단체가 ‘푸른영상’이라고, 빈민·여성·환경 등에 관한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어느날 문규현 신부님이 ‘푸른영상’으로 연락을 하셨어요.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단체가 생겼는데 전북에는 영상물을 만들 사람이 없으니 서울에 있는 단체가 사람을 보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저희 내부에서 회의를 했고 사람을 보내 3개월간 촬영을 하자는 결론이 나왔어요. 기간이 짧지 않기 때문에 기혼자를 제외하다 보니, 생긴 것도 제일 ‘시골틱’하고 알아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제가 뽑힌 겁니다. 마침 저도 내려가길 희망했고요.”

-부안에 내려가 보니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현지 주민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처음엔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이라는 단체 사무실에서 생활했어요. 정상적인 제작팀이라면 최소한 숙식은 확보해줘야 하는데 ‘알아서 하라’는 특명 아닌 특명을 받고 간 거죠(웃음). 그런데 활동가들만 만나다 보니까 이해 당사자인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었어요. 당시 전북에선 새만금사업이 농업용지를 만드는 간척사업이 아니라 대규모 복합산업단지가 들어오는 사업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장밋빛 환상이 있었던 거죠. 반대하는 목소리는 극히 일부였어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혼이 났죠. 제가 여름철에 주로 입은 옷이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는…’으로 시작되는 문구가 씌어 있는 티셔츠였는데 그 옷을 입고 다니면 꼭 누군가가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요. ‘네가 뭔데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느냐’는 거죠. 처음엔 많이 싸웠어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주민들은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그럼 그분들은 어떻게 만나 친해진 겁니까.

“정해진 코스에 정해진 사람만 만나서는 영상물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새만금사업으로 피해를 입는 어민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농민회에 계신 분을 통해 계화리라는 곳을 알게 됐는데 그곳에 어민이 많다는 거예요. 당장 그날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못 보던 사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동네 청년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나봐요. 붙잡고 물어보더군요. 그분들한테 새만금 얘기를 꺼내니까 제가 듣고 싶었던 얘기가 쏟아지는 겁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인데도 카메라로 찍어도 된다고 하고요. ‘이 얘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영상을 찍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날 자정이 넘은 시간에 ‘…부안사람들’ 사무실로 가려고 하는데 교통편이 없잖아요. ‘나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슬쩍 말했더니 대뜸 ‘우리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웃음). 다음날 아침에 밥까지 주더라고요. 숙식이 이렇게 해결됐습니다. 또 어민들 중에 동갑내기가 많아서 친해지기가 더 쉬웠어요. 그 친구들한테 여러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 친구들이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저도 삼촌이라 부르고, 이모라고 하면 이모라고 불렀죠. 그렇게 3개월을 일하고 서울로 돌아갈 날이 되자 그 친구들이 송별회를 열어줬는데, ‘서울 가면 너와 우리는 끝이겠구나’ 하는 겁니다.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푸른영상’을 그만두고 계화리에 눌러앉기로 한 거죠.

-작품을 보면 계화리 어민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일부 어민들은 물막이 공사를 중단해 해수를 유통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고집했고, ‘새만금 연안 피해어민 대책위원회’는 물막이 공사를 막을 수 없다면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주민 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이유가 있습니까.

“대책위원장을 비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공론화하려고 했던 겁니다. 대책위원장님과는 지금도 형님, 동생하는데 그 얘기를 하면 좀 껄끄러워하시죠. 사실 대책위원장님은 좀 안타까워요. 대책위도 그분이 없으면 못 꾸려졌거든요. 다만 대책위를 운영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고, 그 실수를 우리가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자는 거였어요.”

-이 감독은 환경운동가들도 비판합니다. 다큐에서 환경운동가들은 주민들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실 대책위를 비난하기 전에 활동가들에게 비난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책위원장이 싸움을 해봤겠어요, 조직을 움직여 봤겠어요. 평범한 주민이었다고요. 그럼 전북도나 새만금사업단, 경찰 등에서 온갖 전화가 걸려올 것이고 그중에는 협박에 가까운 것도 있고 회유도 있었을 거예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거죠. 그럴 때 흔들리지 않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이런 문제를 공론화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고 싶었어요.”

-대책위의 남성 어민들이 보상을 얼마나 받을 것인지 얘기할 때, 해수 유통이 최우선 요구사항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서울로 와 투쟁하던 사람들은 여성 어민들이더군요.

“새만금사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가르쳐준 분들이 제가 이모, 형수라고 부르는 계화도의 여성 어민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논리 체계를 갖추고 설명하시는 게 아닌데 하시는 말씀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 거예요. 다큐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순덕 이모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철학자들보다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하시잖아요. 깜짝 놀랐죠.”

-다큐에 등장했던 여성 어민들은 지금 어떻게 지냅니까.

“편찮으시죠. 예전에는 갯벌에서 일을 해 돈을 번다는 즐거움이 있었고, 갯벌에 나가서 속상한 것을 풀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막히니까 답답해서 화병이 나는 겁니다. 순덕 이모가 영화 포스터에 없는 이유가 그거예요. 포스터를 찍기로 약속했는데, 찾아가면 아파서 누워계시는 겁니다. 어느날은 순덕 이모를 찾아갔더니 약봉지가 놓여 있는데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어요. 여성 어민들의 증세가 똑같으니까 한 사람이 병원에 다녀오면 그 약을 나눠드시는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요즘은 벌이라고 해봤자 배에서 잡아오는 것을 고르는 작업으로 일당벌이를 하시는데 예전만 못하죠. 남의 돈 받으면서 하는 일이니까 눈치도 봐야 하잖아요. 자기집 살던 사람이 갑자기 망해서 셋방으로 간 거죠.”


-촬영을 하면서 새만금사업 소송의 1·2·3심이 진행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을 텐데, 무력감을 느낀 적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답답했을 때는 술을 마시고 문정현 신부님한테 술주정을 했어요. 우리는 왜 매번 이렇게 힘든 싸움만 해야 하느냐, 우리도 이기는 싸움 좀 하면 안되느냐고 했어요. 신부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나 지금 칠십 넘었는데 지금까지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술이 확 깨더라고요. 저는 새만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 영화의 주인공들과 바다 생명이 있는 한 진행형이에요. 끝나지 않았는데 저 혼자 기권하는 건 창피한 일이잖아요. 질 때 지더라도 저 스스로 후회하지 않는 싸움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21일은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끝난 지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4월은 저에게 잔인한 달이에요. 2006년 4월21일 물막이 공사가 완공됐는데 저는 해마다 4월21일을 전후해서 굵직굵직한 상이나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거든요. 지난해 4월20일에는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에서 주는 ‘환경문화상’에서 환경예술부문 대상을 받았고 올해는 16일이긴 하지만 개봉을 하게 됐어요. 저는 그렇게 보상을 받았는데 저의 주인공들이 받은 게 있다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것뿐이잖아요.”

-전북도가 오는 10월 새만금 방수제 공사에 착수한다고 합니다. 새만금 내부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위기네요.

“지난 3월27일에 내부 공사한다고 군산에 한승수 총리가 오셔서 폭죽 터뜨리고 자축행사를 했다는데 저는 그것을 ‘남아 있는 너희들 다 내쫓겠다’는 선전포고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오체투지 하면서 서울까지 오시는데 저는 지금 누가 오체투지를 해야 하는지 묻고 싶어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이용해서 우리한테 상처를 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얼마 들여서 얼마 버느냐는 숫자놀음만 하고 있어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돈의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요.”

-관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사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당사자들이 완벽한 치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새만금과 대추리, 용산 모두 마찬가지예요. 일어난 일은 주워담을 수 없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라는 거죠.

새만금의 물길이 방조제로 막혔을 때 많은 분이 ‘새만금이 살신성인했다’는 말을 했어요. 새만금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땅에 새만금처럼 큰 국책사업은 없을 거라는 말씀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새만금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대운하 같은 거대한 국책사업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새만금에서 우리가 이겼다, 졌다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싸움의 본질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 최희진·사진 김세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