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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전략적 프레임으로 가르라(옴부즈만)


 언론학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언론 현실에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올곧은 언론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언론 행태를 견제하지 못한 탓이다. 같은 논리로 정치권력의 독주가 횡행하는 건 썩어빠진 권력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속성이란 원래 그런지도 모른다. 이를 감시해야 할 언론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막가파식 권력의 행사는 취약한 언론의 현주소를 방증한다.




 리영희 선생의 존재감은 그래서 더 큰 울림통이었다. 양심의 펜 하나로 평생 이 사회를 짓누른 거대한 우상에 맞섰다. 그 덕분에 우린 비로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경향이 리영희 선생의 타계에 적잖은 지면을 할애한 이유도 그의 유산을 잇기 위해서였으리라. 6일자 사설 ‘리영희 선생의 타계, 그리고 지식인의 책임’은 경향신문의 다짐으로, 9일자 7면 하단의 ‘현장에서-또 다른 리영희를 기다린다’는 경향의 소망으로 다가왔다. 독일의 라퐁텐처럼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고 외쳐도 괜찮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경향이 앞장서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퍼주고, 더 퍼주고, 아주 다 퍼주기’란 삼행시까지 등장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결과. 지난주 초반 경향의 주요 지면을 지배한 의제였다. 민간인과 정치인에 대한 불법사찰은 양파껍질 벗기듯 끝이 없다. 수요일자 1면 머리기사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사찰 당했다”는 의혹 제기였다. 제 버릇 남 줄까.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는 올해도 어김없었다. 목요일 이후의 주요 이슈는 이것이었다.


 필부필부의 갑갑한 심정을 경향 사설이 잘 대변했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이 두렵지도 않은가’(9일) 성토한 데 이어 ‘이것이 정치인가’(10일) 되물었다. 총체적 난국에 거대 담론으로 응수하면서 각론을 놓치지 않은 편집 방향이 좋았다. FTA 분석에선 총괄적 득실 계산부터 정책주권과 자동차 주권의 침해, 쇠고기와 유럽연합 재협상에 작용할 불씨까지 점검했다. 쪽수와 주먹을 앞세운 날치기 통과로 무너진 의회 민주주의, 그 자체는 물론 여파에도 주목했다. 전체 국토의 12%에 달하는 4대강 주변 친수구역이 개발론자들에 의해 유린될 ‘친수구역활용특별법’과 국립대 사영화의 물꼬를 튼 ‘서울대법인화법’ 등이 초래할 폐해를 막는 건 이제 경향신문 같은 정론지의 몫이 됐다.




 아쉬운 건 국정 운영 기조와 개별 정부 정책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프레임’이 약하다는 데 있다. 과거 보수신문은 참여정부를 ‘아마추어’ 또는 ‘무능’ 정권이라 명명하고 종합부동산세를 ‘세금폭탄’이라 칭했다. 옳건 그르건 그 프레임들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사람들 마음속에 총칼보다 무서운 생각의 틀을 주입한 것이다. 보수 인사들은 현명해서인지, 아니면 단순 무식해서인지 프레임 형성을 통해 이슈를 각색하고 선점하는 데 능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딴죽을 걸며 이를 ‘부자급식’이고 ‘망국적 포퓰리즘’이라 우려먹는 게 그 전형이다.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대형 의제들을 각개격파하기란 힘에 부친다. 경향의 지면은 넉넉지 않고, 독자의 이목은 경향의 기대만큼 무겁고 딱딱한 내용에 향하지 않는다. 일망타진을 위해선 단순 명료한 프레임을 통해 이 정부가 행하는 일련의 작태가 자연스레 각인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10일자 ‘예산안 날치기 정국’을 ‘견제 수단 잃은 국회…4대강 사업 폭주 예고’(3면) 차원에서 분석한 것은 타당했다.


 그러나 ‘무모한 靑, 무소신 여, 무기력 야’(4면), ‘몸 던져서라도 막겠다던 민주, 절박함도 치밀함도 여당에 완패’, ‘무력한 야당의 현주소’(5면) 식으로 여야를 싸잡아 비판 구도를 설정한 것은 부적절했다. 이는, 그 와중에도 힘 있는 여야 의원들은 자기 지역구 예산안을 챙겼다는 점을 부각해 사태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보수집단의 프레임을 강화해 정치 냉소를 부추길 뿐이다.


 경향의 11일자 접근은 반가웠다. 단독 입수한 한나라당 증액 요구 자료와 날치기로 확정된 실제 내년 예산안을 비교해 국민의 혈세가 ‘형님’ 이상득 의원과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등 정권 실세에게 유입됐음을 1면 머리기사로 고발했다. 3면 분석을 통해 복지와 친서민을 들먹인 정부·여당의 공언이 사탕발림이었음을 물증으로 보여줬다. 이런 방향성과 톤이 일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일상의 프레임이 되어야 한다.


 경향신문처럼 정파를 초월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에게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는 게 마음 편하진 않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야만의 시대다. 우상을 깨고 이성을 깨우기 위해선 양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가 필요하다. 리영희 선생의 울림은 저 세상에서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