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프로그램에서 성평등 재현, 내용 측면의 다양성 확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10일 tvN의 예능 프로그램 <짠내투어>에서 여성 출연자에게 술을 따르게 한 내용에 대해 양성평등심의조항에 근거, 경고 조치 의견으로 전체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과는 아니지만, 평소 방송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면에 대해 성평등 관점에서 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현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성평등 관련 심의 건수는 계속 증가 추세이다. 한편 KBS가 직장 내 성평등 조직문화를 구현하기 위해 성평등센터를 개소하는 등 방송문화 영역에서 성평등한 조직문화 및 프로그램 내용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가시화되는 중이다.
같은 맥락에서 방송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일상적 남녀관계도 주목받고 있다. 2016년 웹매거진 ‘아이즈(IZE)’는 국제앰네스티와 함께 기획한 ‘#더 이상 설레지 않습니다’ 특집을 통해, 드라마에서 이성애를 묘사할 때 종종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지난 16일 한국여성민우회는 드라마 속에 나타나는 로맨스로 가장된 폭력적 장면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여성민우회가 지난 1년간 방영된 3000여편의 드라마 에피소드를 분석한 결과, 위계관계에서 분명히 우위에 있는 남성들이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폭력을 동반한 행위를 보이는 것이 여전히 다수 존재한다고 한다. 미디어의 폭력 묘사가 바로 폭력을 유발한다는 시각으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규범을 형성하는 데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볼 때, 드라마에 나타나는 로맨스 규범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생긴다. 미디어는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사랑의 규칙을 전달하는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추구라고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존재한다. 이는 국내 언론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고, 온라인 뉴스의 댓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의 주장에서 핵심은 소수자를 고려한다는 명목으로 프로그램 내용에 과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나 예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볼 때 전체적인 드라마의 맥락, 줄거리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면을 잘라내어 비판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정말로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일까? 해당 프로그램이나 제작자에 대한 낙인찍기를 목적으로 수행된다면 물론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대안을 만들고, 다른 재현 방식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는 우리 대중문화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 연예인이 방송에 출연할 때, 몸의 선을 강조하는 춤을 추거나, 여러 남성 출연자 중 한 사람의 이상형을 고르거나, 술을 따르거나, 애교를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상상력 말이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이 흥미롭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갑자기 손목을 잡아채거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복장이나 가야 하는 장소에 대해 제한을 가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비판은 트집잡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것이 가능한가를 같이 고민하자는 요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다른 가능성을 꿈꾸고 보여주는 책임을 제작자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한국 방송 프로그램 촬영장의 노동 강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의 경우, 노동력의 투입이 단기일 내에 집중되고, 불합리한 제작 환경을 감수하면서도 제시간에 맞춰 찍어내는 것이 급선무인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 별 고민없이 관습적인 장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시간과 인력을 절약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길 개연성이 있다.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를 충분하게 논의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제시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이, 이러한 재현 문제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영국의 방송통신 정책 관할기관 오프콤(Ofcom)은 미디어 다양성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인력구조의 문제를 언급한다. 제작 인력의 배치에서 다양성의 가치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것에 일차적 목적이 있지만, 동시에 건강한 인력구조가 존재해야 이것이 프로그램 내용에 반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재현 문제에 대한 지적을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상벌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름’에 대한 요청을 포함하는 것이며, 그 ‘다름’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바꾸어 나가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또한, 이를 위한 구조적 개선의 필요성 역시 아울러 말하는 일이다. 우리의 대중문화는 더욱 다양한 목소리와 시선을 담아낼 때 풍요로워질 수 있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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