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담론이 거세다. 여성혐오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더니, 남성혐오도 말해보자는 항변이 들린다. 이것도 혐오 저것도 혐오, 혐오 대상이 아닌 게 없다. 혐오를 혐오한다는 당착의 말도 등장했다. 혐오주의자, 혐오할 자유, 혐오발언 규제, 혐오죄 등 알 수 없는 말들이 돌아다닌다.
나는 혐오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가 병적이라 생각한다. 억압을 직시해야 할 시선을 흐리고, 차별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여혐’이란 용어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내가 보기에 이 용어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감정과 표현의 문제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을 사용할수록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가혹한 현실’은 뒤로 숨고 ‘여성을 미워하며 막말과 악행을 일삼는 타인의 말과 행동’이 앞에 나선다. 이 말에 얽매일수록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차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혐오스러운 말과 행위에 맞대응하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혐오를 미워해서 맞대응하자는 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여성주의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혐오는 규범적으로 왜곡되기 쉬우며 따라서 공적인 실천을 위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삼기 어렵다. 일단 도덕적으로 타락한 악행이든 정치적으로 개탄스러운 만행이든 혐오를 이유로 타인의 행동을 규제하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혐오란 오염과 감염을 막기 위해 상대방을 격리해서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동반하는데, 이는 인간성에 대한 부정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너스바움은 심지어 인종주의자나 테러리스트마저 혐오를 이유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혐오가 싫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감정 연구자들에 따르면, 혐오는 인류가 갖는 기본 감정 중 하나라고 한다.
혐오란 진화적으로 형성되고, 문화적으로 강화되며,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변이성을 갖는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우리는 끔찍한 장면을 보거나 역겨운 생각을 접했을 때 느끼는 혐오감을 억누를 수 없다. 혐오로 인한 표정 변화와 생리적 반응을 통제하기 어렵다. 혐오를 표현하는 발언마저 자제하기 어렵다.
이런 혐오이므로 우리는 시민적 덕성과 공존의 예절에 따라 혐오 반응과 표현을 순화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 또는 혐오에 얽매이는 게 아닌 다른 적절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동료 시민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차별을 받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 중 하나로 분노가 있다. 분노하는 시민은 억압적인 제도의 부당성을 문제 삼고, 억압자를 가려내고, 그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불행하게도 혐오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집단 간 차이를 강조해서 없었던 경계를 만들어 낸다. 경계 밖의 타자를 회피하고, 경계를 넘어 침투하는 자를 처치하려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혐오할 자유란 없다. 혐오감에 취약하고, 혐오 상대를 못 견뎌 하며, 혐오 발언을 참지 못하고 내뱉는 가련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또한 혐오행위는 물론 혐오발언마저 규제할 방도가 없다. 대신 우리는 성별, 연령, 종교, 장애, 성정체성, 민족, 인종, 정치 이념 등을 이유로 특정 사회집단에 속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특정 사회집단에 속한 자를 증오해서 저지른 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법을 만들 것을 계획할 수 있을 뿐이다.
여성주의 사회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보다 더한 증오의 발언이라 할지라도 규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혐오 발언>이란 책에서 증오발언을 일삼는 자가 그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는데, 이 요점이 중요하다. 증오발언을 내뱉는 자는 자신의 발언에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적 비난과 압박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증오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다. 혐오를 동원하고, 증오를 도구화하고, 증오발언을 만들어 낸 억압적 권력은 따로 있다. 권력은 투명한 관행과 규칙, 그리고 무심한 법과 제도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니 혐오감정이나 증오발언에 휘둘리지 말자. 대신 혐오와 증오를 낳는 차별적 제도와 억압적 구조에 주목하고, 그것을 개혁하자.
어떤 이는 여성혐오가 ‘미소지니’라는 고대 희랍어에서 기원한 말을 번역한 것이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남성혐오는 ‘미샌드리’가 되고, 외국인 혐오는 ‘미소제니’쯤이 되겠다. 그러나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없애자는 데, 혐오 상대를 특정해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예컨대 소아성애를 뜻하는 ‘페도필리아’가 어떤 도착적인 상태를 암시하듯이 소아혐오를 뜻하는 ‘미소피디아’도 그러하다. 사회 자체가 병적인 상태에 빠지는 게 문제인데 도착적인 개인의 상태를 특정해서 문제 삼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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