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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최희진의 뉴스 속 인물

“神들의 고향 제주에 세계 무당들이 와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ㆍ문화올림픽 세계델픽대회 조직위원장 유홍준

한 권의 베스트셀러는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첫 출간 이후 1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잘 팔린다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그렇다. 출판사는 경영이 호전됐을 테고 <…답사기>에 소개된 음식점과 여관 주인들은 밀려드는 손님 행렬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최대 수혜자는 저자인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60)다.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스타 필자의 반열에 올랐다. 참여정부 시절엔 문화재청장으로 임명돼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숱한 구설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고 숭례문 화재 사고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지만, 그의 재임 기간만큼 문화재청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지난해 2월 문화재청장 퇴임 이후 언론에서 모습을 감춘 유 교수가 오는 9월 제주에서 개최되는 제3회 세계델픽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고대 그리스의 ‘델픽 게임’에서 유래한 델픽대회는 예술가들이 재능을 겨루는 문화·예술 올림픽을 말한다. 지난 23일 서울 명지대에서 유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제주는 신들의 고향이니 신들에게 바치는 델픽대회를 치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라며 “문화의 다양성을 펼쳐보이는 문화경연대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왕릉에서의 숯불 오찬이나 문화재청 예산으로 자신의 저서를 구입했던 일 등 재임 시절 비난받았던 사건들에 대해 적극 항변하기도 했다. <…답사기> 이후 저술 작업이 너무 부진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문화재청장을 지내고 나니 독자들에게 문화재 행정의 어려움도 함께 얘기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며 “잘못하면 벼슬하더니 사람 버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글 쓰는 게 조심스럽다”고 했다.

-문화재청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청장 그만두고 바로 명지대 미술사학과에 복직했죠. 지난해 3월부터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오랜만에 학교에 오니까 학생들이 제 강의를 듣길 원해서 수업을 많이 했어요. 3과목만 해도 되는데 5과목이나 강의했으니까 정신없이 지냈죠. 이번 학기에도 3과목을 강의합니다.”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의 조직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된 건가요.

“지난해 10월 제주도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찾아왔어요. 델픽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평소 신뢰하던 이건용 선생(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집행위원장을 한다고 하기에 그분한테 물어봤더니 델픽대회의 중요성을 얘기하시고 저한테 맡아달라고 요청하더라고요. 델픽대회가 잘되면 민족적 색깔이 드러나면서도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문화 경연대회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용 선생, 신선희 예술총감독(전 국립극장장) 같은 공연기획의 선수란 선수는 다 집결시키고 종목을 무엇으로 할지, 참가 요령은 어떻게 할지 논의해서 천신만고 끝에 프로그램을 확정한 거죠.
다른 이유를 하나 더 꼽자면, 고지식한 행정가들과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델픽대회라는 게 아직 우리에겐 생소합니다. 문화예술 부문의 올림픽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림픽처럼 대회에 참가한 예술가들의 등수를 정해 메달을 수여하는 방식입니까.

“점수를 매겨 금·은·동메달을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좋은 예술가들이 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스포츠와 달라서, ‘나 정도 실력에 메달을 받겠다고 거기에 참가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경연과 페스티벌로 분야를 나눈 겁니다. 비경연 부문인 페스티벌은 우리가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샤머니즘 페스티벌’은 세계 각국의 무당을 초청하는 건데, 얼마나 멋있겠어요. 올림픽처럼 델픽도 신에게 바치는 대회인데, 제주는 1만8000 신의 고향이니 개최지로 더할 나위 없이 알맞지 않습니까.
또 제주의 풍광이 참 아름답잖아요. 제주의 풍광만 가지고도 이 대회는 절반은 성공한 거죠. 다만 야외 행사를 할 때 비가 자주 내릴까봐 그게 걱정이에요(웃음).”

-참가국과 참가 예술가들의 규모는 결정이 됐습니까.

“최소한 20개국이 참석하고 좀더 노력하면 30개국은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악가나 바이올리니스트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페스티벌에 참가하든 심사위원을 하든, 좀더 많이 참가할 수 있도록 섭외하고 있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시낭송을 부탁할 수도 있고요. 델픽대회를 통해 제주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질 겁니다. 경연 종목은 이후의 4회, 5회 대회로 이어지겠지만 페스티벌은 제주에 남거든요. ‘샤머니즘 페스티벌’ ‘돌담쌓기’ 같은 종목은 델픽대회가 끝난 후에도 제주에 남아서 이 종목들만으로 2회 대회가 열릴 수 있는 거예요.
또 제주도하고 협의 중인 사항인데, 제주에서 진행하고 있는 건축 프로젝트 하나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학과가 있는 7개 대학에 지정 공모를 주는 겁니다. 그중에서 금메달을 받는 작품을 제주가 시공하는 거죠. 이런 아이디어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을 좀더 해보려고 합니다.”

-델픽대회를 준비하면서 제주를 돌아보셨을 텐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의 눈으로 본 제주의 매력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앞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권을 쓴다면 제주도를 써야 해요. 다른 건 몰라도 꼭 써야 하는 게 제주도와 서울이에요. 그래서 제주도를 더 알고 싶었어요. 조직위원장을 맡은 데는 제주의 속살을 더 알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작용한 것도 있죠. 제주에 ‘본향당’이라고 하는 중요민속문화재가 있어요. 문화재청에서도 관리하는 신당(神堂)이죠.
팽나무 고목이 음습한 곳에 서 있는데 색동옷과 하얀 종이가 사방으로 휘날려요. 문화재청장 시절엔 그런 것을 보면 ‘아무리 무속이라지만 좀 정리하고 살면 안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직위원장을 맡고 난 다음에 시인 김순희씨가 자기하고 한 번 같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이전엔 모르던 얘기를 알고 나니 본향당이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본향당에 오는 사람의 제물은 초 2개가 기본이에요. 또 중요한 게 소지(素紙)라고 하는 흰 종이입니다. 한지를 접어서 가슴에 대고 기도를 한 다음에, 이 흰 종이를 나무에 걸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종이에 전사돼서 신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거예요. 경제력이 좀 있는 사람은 색동저고리로 옷을 해서 신에게 바치는 것이고요. 그래서 흰 종이와 색동옷이 나무에 휘날리는 겁니다. 지나가는 관광객 입장에선 저것 좀 정리했으면 좋겠는데, 제주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 입장에선 그들의 소망이 거기 담겨 있는 거죠. 관광객의 시선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번 델픽대회에서도 소지를 안고 소원을 비는 행사를 할 겁니다. 또 제주를 글로 쓰려면 4·3사건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델픽대회를 계기로 제주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겁니다.”

-그간 일 외에도 개인적으로 답사를 다녔습니까.

“엄청 다녔어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정독한 독자들은 제가 한 곳을 쓰기 위해 한 20년은 다니고 썼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안 가봐서 쓰지 못하는 지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충청북도를 답사기에서 왜 빼 놓았을까 연구를 해봤죠. 자신이 없어서 못 쓴 거예요. 충청북도에서 잠을 자 본 기억이 없어요. 그 지역을 스쳐간 자의 글과 그곳에 머물면서 지역 사람들의 체취를 안고 쓰는 글은 전혀 다르거든요. 그게 자신 없으면 글을 쓸 필요가 없죠.”

-답사기 마지막 편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이 출간된 것이 1997년입니다. 이후에도 <화인열전 1·2> <완당 평전 1·2·3> 등을 펴내긴 했지만 저술 활동이 너무 뜸한 것 아닙니까.

“우선 ‘창비’ 출판사가 답답하겠죠. 책이 나오면 회사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웃음).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선 1·2·3권보다 잘 쓰지는 못해도 1·2·3권만한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책을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안 쓰는 게 낫죠. 똑같은 패턴을 유지하면서 유물만 다른 것으로 대입해서 쓴다면 벌써 썼어요. 그런데 그동안 사회적 상황도 바뀌고 저 개인도 사회적 지위가 바뀌는 현상이 일어났잖아요.

그 책이 출간된 93년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라 지나간 권위주의 시대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권위주의 정부 아래에서 문화재가 어떻게 수모를 당했는지 책에 쓰니까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알게 된 거죠. 그러다 민주화가 되고 나니까 글이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어요. 더군다나 문화재청장을 지낸 입장이 되니 이젠 글에 경륜이라는 것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밑에서 위를 쳐다보며 ‘그게 뭐하는 거냐’고 손가락질하다가 이제 (문화재 행정을) 해봤던 사람 입장에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독자들에게 우리 이런 것을 같이하자고 호소해야 하는 입장이 된 거예요. 그것을 잘 쓰면 멋있는 것이 되고, 아니면 벼슬하더니 사람 버렸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저로서는 자신이 없었어요.”


“구설 참 많았는데, 끝내는 文士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유홍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문화재 행정에 관한 의견을 묻자 “현 문화재청장이 참가하는 행사에는
              축하하고 싶어도 가지 않는다”며 “전임자가 얘기할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김세구 선임기자


-문화재청장 재임 시기를 돌이켜봤을 때, 조금 더 신중하고 세심하게 살피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은 일들이 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문화재청장을 참 행복한 여건에서 했어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전남 나주에 새로 만들었고 문화재 종합병원도 만들었으니까요. 끝내 하지 못해 아쉬운 것은 직영 문화재 보수단을 만들었어야 했다는 겁니다. 정부에선 문화재 수리를 되도록이면 민간에 맡기고 있는데 문화재의 경우엔 그렇게 하면 기술축적이 안돼요. 숭례문·광화문처럼 국가적으로 큰일에는 대목장 같은 전문가들이 동원되지만 무수한 문화재들을 부분적으로 보수하고 점검하고 예방하는 일은 직영단이 아니면 하기 어렵거든요.
또 하나는 목조 건축에 관한 문제인데, 일단 춘양목이라고 하는 육송은 우리가 확보한 것이 있어요. 문화재청에서 강원 삼척시의 준경묘 100만평에 15만주를 기르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체의 제재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무를 베서 바로 쓰는 게 아니고 나무를 겨울에 베서 그늘에서 1~2년 말리든지 스팀에서 찐 후에 써야 집이 뒤틀리지 않거든요. ‘작은 정부’도 좋지만 문화재에 관해서는 오히려 반대로 가야 하는 거죠.

-청장 재임 시절, 문화재청의 정책이나 행사가 청장 개인의 이벤트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 중에서 가장 컸던 게 2005년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환수해 북한에 인도했던 일이었어요. (당시 일부 언론에서 문화재청장이 북관대첩비 관련 행사를 7차례나 개최했다고 지적했으나) 그건 문화재청이 주관한 것이 아니고 북관대첩비 환수위원회가 행사를 연 겁니다. 거기에 청장이 참가를 안 할 방법이 없었어요. 북악산 개방이나 경회루 개방은 국민들이 좋아할 일이었죠. 그러니까 기사가 크게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북악산 개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구 국회의원 할 때부터 ‘서울시장이라도 되면 저것부터 열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대통령이 되면서 제일 먼저 지시를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북악산 개방을 서울성곽 개방으로 이름을 바꿔서 문을 연 거예요.”

-언론 보도에 그만큼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 문화재청장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장을 한 소감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원없이 터지고 원없이 일했다’예요. 저는 정말로 원없이 일했고 일부 언론으로부터 원없이 터졌어요. 그래도 고궁에서의 만찬만은 제 고집으로 버텼습니다. 고궁에서의 만찬은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예요. 세계 어느 나라든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국제대회를 열 때 다 고궁에서 만찬을 했어요. 왕조가 없는 캐나다·뉴질랜드 등은 박물관에서 했습니다. 그게 국제적인 모습이에요. 우리나라가 일류로 간다고 말은 하지만 국제행사를 여는 것에 있어서는 문화의 수입국이었지 공급국이 되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몰랐던 거죠. 2004년 국제검사협회 만찬을 경회루에서 하도록 허가했다고 말이 많았는데 경회루가 원래 외국 사절을 맞아서 만찬하는 곳이에요.”

-2007년 5월에는 경기 여주의 효종 왕릉 재실(齋室) 앞마당에서 숯불을 피우고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습니다.

“그때 저희가 재실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고 하는데 고기를 구워먹은 일은 없습니다. 밥은 다른 데서 해왔고 국만 데운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는 지난 300년간 매년 밥을 해먹은 자리예요. 제일 억울했던 건 문화재청 예산으로 제 책을 구입했다고 비판받았던 부분입니다. 문화재청은 보통 금관 모양 귀걸이 같은 문화상품을 만들어서 방문객들에게 기념품으로 드렸는데, 그것을 제가 책으로 바꿨습니다. 제 책만 드린 것도 아니에요. <또 하나의 유산>이나 <경복궁> <궁궐의 우리 나무> 등의 책을 드렸는데 문화재청을 방문하시는 분들 중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드린 겁니다. ”

-기념품이 책이어서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하필 현직 청장의 저서였기 때문에 비난을 샀던 것 아닌가요.

“그건 제가 베스트셀러를 쓴 청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어요. 문화재청 예산으로 제 책을 샀고, 그래서 3년 동안 그 책의 판매로 받은 인세가 70만원은 될까요. 2006년 보도됐던 낙산사 동종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느날 신문을 봤더니 낙산사에 새로 만들어 설치한 동종에 내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저도 처음엔 ‘어떤 미친놈이 내 이름을 써넣었냐’고 했는데 알고 보니 공사 실명제로 이름을 넣은 거였어요. 책임자 이름을 써넣은 것을 (언론에서) 청장이 자기 이름을 넣었다고 변질시켜서 얘기한 겁니다.”

-구설이 많았는데도 청장으로 3년 반이나 재임했습니다. 장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맷집이 좋아서 그래요(웃음). 당시 명지대 이사장이었던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그때 저한테 ‘아침에 신문 보기가 겁난다’고 했어요. 기사가 겁나는 게 아니고 제가 그것을 또 받아치니까 그게 겁난다는 겁니다(웃음). 그래도 언론 보도 때문에 문제가 됐을 때 문화재청 직원들에게 ‘어떻게 언론에 대처했기에 이렇게 됐냐’고 따져본 적 없습니다. 그 점은 노 전 대통령도 똑같았어요.”

-노 전 대통령을 퇴임 이후에 종종 만납니까.

“봉하마을에 두 번 찾아갔죠. 지금은 갈 수도 없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만 있어요. 저는 그분이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생각을 이해하고 싶은 정서가 있어요.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꽤 고민을 많이 한 분이에요. 이 분이 고향에 가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화포천에 미련을 그렇게 많이 가졌던 겁니다. 재임 시절에 한 번은 저한테 진영에 같이 가자고 해서 화포천 갈대밭에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이런 것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사례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기에 뒤셀도르프에서 봤다고 알려드렸어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관련 자료를 달라고 해서 총무비서관한테 보내주기도 했고요.

또 노 전 대통령이 숲 해설사를 하고 싶어 했어요. 꽃말에 관한 책을 좀 보내달라고 하기에 제가 식물학자 박상진 교수한테 물어봐서 책을 하나 만들기까지 했어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화포천 사업이라고 하는 게 돈 벌려고 한 것이 아니라 트러스트 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장에 임명되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장 후보에도 지원한 일이 있는데, 청장 퇴임 이후 박물관장 제의가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까.

“지금은 그럴 의사가 없어요. 앞으로 5년은 명지대 미술사학과가 최우선이죠. 그리고 제주 ‘추사기념관’ 명예관장 직책을 멋있게 할 겁니다. 그것을 멋있게 하기 위해서 청장 시절에 제 소장품도 기증하고 주변 사람들도 기증시켜서 유물을 확보했잖아요. 추사기념관, 무보수지만 사실 돈 그렇게 필요 없어요. 인세만 갖고서도 충분하니까.”

-인세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청장 재임 시절에 공직자 재산신고 한 것을 보면 나오잖아요. 우리 마누라 통장에 있는 게 15억원 정도인데 아마 그대로 있을 거예요(2007년 3월 고위공직자 재산신고 내역에 따르면 유 교수는 예금만 16억8795만원을 보유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저술가 등 여러 직함이 따라다니는데 어떤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전도사예요. 문화유산 전도사. 1985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라는 공개강좌를 할 때부터 한국 미술의 문화유산을 젊은이들에게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을 한 겁니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한 거예요. 만약 프로젝트로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 못하죠. 그리고 주변에서 그렇게 불러줄 수 있다면 문사(文士)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전문적인 지식이 있으면서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나 안목도 갖춘 사람, 그것을 글로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문사인데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부류의 사람들이 없어져 버렸어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어 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운 대목인 것 같습니다.”


-델픽 조직위원장도 맡고 있지만, 앞으로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텐데요.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까.

“요새 개인적으로 제일 관심 있는 것은 부여에 있는 주말 주택이에요. 노 전 대통령이 예전에 저한테 빨리 서울을 떠나서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 농민 수가 지금 350만명이랍니다. 20년 후에 100만명 남으면 성공이라고 할 정도로 농민 수가 줄고 있어요. 그럼 그만큼 폐가가 늘어날 것 아닙니까. 시골의 향촌 마을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노 전 대통령도 저처럼 홀로서기가 되는 사람들은 지역으로 많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하신 거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거리로 보나 뭘로 보나 부여가 좋아서 부여에 폐가 하나를 사서 8평짜리 한옥을 예쁘게 지었습니다. ‘5도2촌’이라고,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농촌에서 살고 있어요. 은퇴하면 ‘2도5촌’이 되겠죠. 이것이 앞으로의 30년을 준비하는 제 나름의 방법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갔던 그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신조는 변함이 없어요. 문사로서의 임무를 다할 때 제가 생각해왔던 인생목표에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홍준은 누구인가
74년 민청학련 연루 구속… 문화재청 사상 첫 ‘스타 청장’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수감됐다. 입학 13년 만인 8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85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토대가 된 공개강좌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를 시작했다. 93년부터 총 3권을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참여정부의 문화재청장에 임명된 것은 2004년 9월이다. 문화재청 사상 최초의 ‘스타 청장’으로서 문화재청의 인지도를 끌어올렸으나 구설도 많았다.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같은 곳’이라고 하거나 문화재청 예산으로 자신의 저서를 구입하는 등 부적절한 언행으로 입길에 자주 올랐고, 임기 말 숭례문 화재까지 겹치면서 재임 기간 대국민 사과문을 5차례나 발표했다.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현재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오는 9월 제주에서 열리는 제3회 세계델픽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최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