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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백만 촛불이 만든 언론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있다. ‘키티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도 불리는데, 1964년 뉴욕의 한 외진 길에서 당시 스물 한살이었던 키티 제노비스가 살인마로부터 참혹한 공격을 받고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른 사건에서 비롯된 말이다.

 

제노비스가 죽어가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동안, 그 장면을 목격하거나 소리를 들은 인근 주민들은 그녀를 돕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창문을 닫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살인자는 다시 한번 현장으로 되돌아와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그녀를 또 한차례 폭행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냉정한 사회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고, 허술한 구조체계에 대한 경각심도 생겨났다. 911로 대표되는 현재 미국의 긴급재난 구조시스템이 시작된 것도 이 사건으로부터이다. 학계에서도 이 사건을 주목했다. ‘방관자 효과’라는 말은, 주위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그 다른 사람들이 다수이면 다수일수록 그 상황을 외면하기 쉬워지는 현상, 바로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니더라도’, 또는 ‘나 말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 사건이, 혹은 이 사건에 대한 오해가 실은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사건의 피해자인 키티 제노비스의 친동생이 그로부터 무려 50여년이 흐른 후, 당시의 목격자들, 다시 말하면 방관자들을 인터뷰했다.

 

<38인의 목격자>라는 한국어 제목이 달린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에 응한 당시의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결코 방관자가 아니었음을 역설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질러 범인을 쫓아버렸고,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했고, 누군가는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피해자를 자신의 딸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확산되었을까? 다큐멘터리는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사와 그 신문사의 영향력에 주목한다.

 

사건 발생 후 정확히 52년, 제노비스의 살해범이 감옥에서 생을 마친 것을 계기로, 뉴욕타임스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50년 전의 기사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그렇다고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세상이 그 정도로 참혹하고, 사람들이 그 정도로 냉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이와 같은 현상의 시발점이 되었던 당시의 기자, 지금은 선정적인 기사의 대표적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의 인터뷰였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그 일로 영향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크게 달라졌지요.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늙은 기자의 항변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기사가 세상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세상을 바꾸지 않았고, 그의 기사도, 그가 몸담았던 그 언론사도 그렇지 않았다.

 

최근 워터게이트 사건이 자주 거론되었다. 임기 중 대통령이 탄핵소추되고, 마침내 사임을 하는, 그런 상황들이 국내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일 터이다. 여기에도 영웅적인 기자들이 등장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소한 사실들에 주목해, 그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끝에, 마침내 세상을 바꾸는 진실이 되게 한. 워싱턴 포스트의 신참기자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시작된 사소한 단서를 물고 늘어진 끝에,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른바 탐사보도. 끝없는 취재, 숨겨진 취재원, 사실의 조각들, 퍼즐 맞추기, 과감한 고발과 신랄한 보도. 닉슨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도 사람들은 그 두 기자의 활약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펴낸 책을 읽었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봤다. 배트맨이나 슈퍼맨이 아니더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고쳐가는 세상, 바르게 만들어가는 세상, 그런 것을 바라보는 위안일 터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을 바꾸었나?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세상이 바뀐 것은 분명한데, 그 세상을 바꾼 것은 누구인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가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연방수사국, 연방 검사, 대법관, 의회 위원회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의 언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셧슨이 한 말이다. 언론의 역할이 신화가 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한데, 나로서는 이 말이 역으로, 언론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그 언론을 지지해주는 국민들의 힘에 대한 역설로 읽힌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언론이 100만 촛불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촛불을 든 100만이 그 언론을 있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동적인 기사도, 그 어떤 위대한 진실을 담은 고발도, 그 영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들에 의해 좌우된다. 세상은 딱 그만큼의 속도로 움직이지만, 조금이라도 앞서 당기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힘껏 뒤에서 밀거나 하는 힘이 있으면, 한순간 급변하거나 혁명적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의 언론들과 일으키는 충돌이 화제다. 주류언론들을 믿지 말라고 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기자하고만 말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 주류언론들이 소설을 쓰고 있다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민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에게만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언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누구나 안다. 세계의 역사를 봐도 안다. 그러나 여전히 더 위대한 건, 나와 당신, 우리들의 힘이다. 방관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다. 100만이 모여도 1000만이 모여도, 나 하나쯤은, 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다. 이 많은 사람들의 고단함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탄핵정국이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 후 촛불을 들었던 100만, 1000만의 이름 없는 영웅들은 다시 사소하고 소소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갈 터인데, 하루라도 빨리 정국이 마무리되어, 그 사소하고 소소한 삶을 상식적이고 건강하게 지켜줄 정부가 들어서길 바랄 뿐이다.

 

소설가 김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