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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퀴즈 연대기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어릴적 일요일 아침 식사 때마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과 함께 고교생을 위한 퀴즈 프로그램이 TV에서 방영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973년 MBC에서 시작되어 EBS로 자리를 옮겨 지금도 35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 <장학퀴즈> 말입니다. 프로그램 속 단정한 진행을 보여주던 차인태 아나운서가 낸 문제를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밥을 먹다 어쩌다 한 문제라도 맞힐라치면, 한 주 내내 학비를 대기 위해 힘들게 일한 부모님들은 당신들의 수고가 씻기는 듯이 뿌듯한 눈빛을 서로 은밀히 교환했던 장면이 그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1975년도 경향신문의 기사 중 흥미로운 내용이 보입니다. “고교생들의 지혜와 재치의 대결장인 MBC TV <장학퀴즈>에서는 출제의 범위를 넓혀 국가안보와 반공 윤리 및 국학에 관한 문제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 프로에서는 문학, 과학, 사회, 예능, 상식 등 5개 분야에 걸쳐 출제를 해 왔는데 국민총화와 반공의식이 요청되는 시기를 감안한 내용을 30%가량 포함시키기로 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그 당시 방송과 국민을 바라보는 시각과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그야말로 ‘웃픈’ 이야기입니다.

 

위의 기사에서처럼 프로그램이 ‘고교생들의 지혜’를 표방한다 했지만 막상 출제되는 문제는 주로 ‘지식’을 묻는 것들이었습니다. 심사의 공정성과 당시 고등학교 공교육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프로그램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출연진이 명문대에 속속 합격했다는 소식이 지면을 통해 종종 보여지던 흔적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1년도 한겨레의 ‘방송 주평’ 코너에서는 “단순 지식량의 측정을 못 벗어”라는 머릿말로 <장학퀴즈>가 “사실 확인이 가능한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데 그치고 있다며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후 20여년이 흐르도록 <도전 골든벨>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대학입시가 학력고사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는 것처럼 여전히 퀴즈 프로그램의 출제 문제들은 ‘교과서처럼 공유되는 객관적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한계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언론사의 입사 시험에서도 빠지지 않고 묻는 ‘상식의 암기 총량’이 더 이상 실질적인 효능으로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사회가 이미 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미 형성된 객관적 사실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접근이 무제한적으로 쉬워진 세상이 온 것이지요.

 

이승엽이 평생 친 홈런의 숫자가 600개를 넘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내기하던 술자리의 호기는 어느덧 스마트폰의 검색창이 오자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미국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IBM의 왓슨이 무적의 인간 출연자를 물리친 것이 2011년도인데, 그 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2018년 1월 중국의 알리바바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독해력 시험에서 인간보다 좋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글을 읽고 그 속의 내용을 정리하여 대답하는 것은 이제 기계가 인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자연어 질의응답뿐 아니라 음성인식과 합성 분야도 기계학습의 고도화와 더불어 빠른 진전을 보여주고 있어, 더빙을 맛깔나게 하는 성우와 뉴스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아나운서에 대한 수요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합되면 앞으로는 나와 친구의 대화를 듣던 인공지능 비서가 대화 속 사실에 대한 정오 판단을 즉시 내려 우리의 대화 중 끼어들어 정정해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친구분의 말씀 중 이승엽의 홈런수는 625개가 아니라 626개입니다”라고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친구가 돌아간 후 오늘 그가 내게 한 이야기 중 객관적 사실의 정확도가 84%이고 대화 속 논리적 오류가 7%라는 통계를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친구의 신뢰도를 측정하여 돈을 얼마까지 빌려줘도 될 것인지 대신 판단해 주는 세상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농담 같다고만 생각하시는 분은 보다폰이나 도이치텔레콤 같은 기업들이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 면접관을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최신 기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측을 정확히는 못할지 몰라도 이러한 변화가 오고 있음을 막연히라도 느끼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제 객관적 지식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묻는 프로그램인 tvN의 <뇌섹시대 - 문제적 남자>에 매료되는지도 모릅니다. 창의적 사고와 유추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부분은 아직 기계보다는 나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만약 기계가 좀 더 발전하여 이 부분마저 가져간다면 그 다음은 치열한 심리전 속 감과 전략으로 인간끼리의 승부를 가르는 같은 방송사의 <더 지니어스> 같은 프로그램들이 더욱 사랑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기계와 싸워봐야 승산이 없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제 경쟁의 상대를 스스로의 마음도 잘 모르는 같은 종으로 한정하는 방법이 그나마 ‘공평한 규칙’일 수밖에 없는 21세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듯합니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마인드 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