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시리즈=====/들풀의 미디어 뒤집기

[밖에서 보기] 너는 내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

이를 클리닝(한국말로는 스케일링, 사실 여전히 한국말은 아니지만)하러 치과엘 갔다. 이 병원에서는 스케일링은 보통 치과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와 약속을 한다.

간호사 혼자 작업을 하기 때문에, 입 안에 고인 세척용 물이나 침을 빨아내는 석션 빨대는 내가 들고 있어야 한다. 간호사가 드릴 같은 도구로 작업을 하다가 신호를 하면, 나는 어린 아이 젖 빨듯이 빨대를 물고 입 안의 물을 빨려 낸다. 고급스러운 치과용 의자에, 앞에는 모니터가 너서 개씩 달려 있고, 환자가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시시 않도록 색깔을 입힌 보안경까지 제공하는 곳인데도 그렇다. 물자는 싸고 사람은 비싼 동네의 한 단면이다.

그동안 나를 봐줬던 사람은 중대장처럼 생긴(이란 말이 가능하면) 아저씨 간호사였는데, 휴가라도 갔는지 '잰'이라는 아줌마 간호사가 들어왔다. 비슷한 방법으로 클리닝을 끝내고 마지막에 그녀가 물었다. "뭐 궁금한 거 없냐? 질문해라."



여기서 잠깐 여담 하나. 뭔가를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사람은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이 끝나고 나서 대개 질문 없냐고 물어 보게 마련이다.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언젠가 학생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났을 때의 일이다. 나는 "Do you have any questions?"라고 해야 할 것을 "Do you have any problems?" 이라고 해버렸다. 그러니까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말해야 하는 장면에서, "내가 보여준 거에 무슨 불만 있어, 씨바들아?"해버린 꼴이다.

학생들은 쫄았는지 조용히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두어 학생이 질문을 했는데, 얘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충격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맥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잰 아줌마는 프라블럼? 하지 않고 퀘스쳔? 했기 때문에, 나는 따로 특별한 용기를 낼 필요는 없이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던 두 가지를 물어 보았다. 첫째, 리스터린 같은 마우스 워시를 쓰는데, 그 강한 자극에 적응이 되지 않고 여전히 고통스러워서 좀 걱정이 된다. 미각이 상하거나 둔해진다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둘째, 치간칫솔이라는 꼬마 칫솔을 쓰는데, 이게 이 사이의 간격을 더 넓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봐야 할까.

치과 간호사 잰 아줌마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마우스 워시에 대해서는,

잰: 그걸 왜 쓰냐?
나: 뭐라구?
잰: 비싼 돈 주고 그걸 왜 사서 쓰냐고.
나: 아니 입 속의 세균을 죽인다는데? 뭐 99%라든가...
잰: 담배도 그런데?

여기서 나는 머리가 멍해지며 말문이 막혔다. 밤마다 고통을 무릅쓰고 가글을 하는 이유란, 병에 적힌 대로, 혹은 상식대로 이 액체가 입 속의 세균을 제거해 주므로, 밤에 잘 때 입 속의 위생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왜 하고 있냐니. 이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이 나의 믿음을 간단히 깨 버린다.

아니, 그보다 우선 잰 아줌마의 논리를 어떻게 이해햐야 하는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마우스 워시를 쓰지 말라는 근거를 대려면, 광고만큼은 효과가 없다거나 세균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담배와 비교하다니? 구강 위생을 위해서 담배를 피우란 말인가.

잰: 리스터린 살 돈 아꼈다가 나중에 치과 치료할 때 보태라. 아니면 휴가 가는 데 보태든지.

돈 이야기가 나와서 더 헷갈리게 되었다. 설령 마우스 워시와 담배가 같은 효과를 낸다 해도(그것도 믿기 어렵지만), 담배보다 리스터린 값이 훨씬 싸다. 게다가, 마우스 워시가 입 속 세균을 퇴치하는 데 효과가 있고 이게 치과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푼돈을 들여 그걸 하지 않다가 입병이 생기거나 이가 상하면 치과 치료에 목돈이 들게 된다. 결코 효과적인 방안이 아니다.

그래서 내 원래의 퀘스쳔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너는 내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예전에 캐나다를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올 때 일이다. 어찌 하다보니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국경을 통과하게 되었다. 9/11 이후라 입국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라서 그랬는지, 입국 심사관이 까다롭게 굴었다. 톨게이트 부스처럼 생긴 심사대에서 고개를 내민 심사관이 제일 처음 던진 질문은 "왜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미국으로 들어오는가?"였다.

여기서 나는 서구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 아닌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쉬운 대답을 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게 더 공들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 문화권에서 이런 대답은 대답이 아니라 변명이나 군더더기, 횡설수설이나 장광설로 본다. 짧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거기에 대해 궁금증이 있다면 다시 질문하고, 또 거기에 짧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하는 게 이쪽의 실무형 대화 방식이다. 짧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면,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학생들은 무언가를 자꾸 설명하려 한다.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치 뭔가 보여주겠다는 듯, 한참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교수는 맥이 빠지고 다른 학생들은 하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다면, 하고 싶은 말의 20% 정도만 실제로 말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내가 왜 이 늦은 시간에 미국 입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심사관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배경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작자는 갑자기 "웨잇, 웨잇"하며 내 말문을 자르더니, 그 펀치를 날린 것이다. "너는 내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

그가 요구한 대화 상황은 이런 것이었을 게다:

심사관: 너 왜 늦게 오는데?
입국자: 늦게 출발했거든.
심사관: 왜 늦게 출발했는데?
입국자: (예를 들어) 난 원래 밤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이러면 심사관은 자기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데 대해 답을 얻게 된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대화가 더 지속될 테고. 이렇게 벽돌 하나하나 쌓는 듯한 방식이 이치들의 대화법이다. 이들은 한 큐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대화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을수록 말이 간단 명료해지고 모를수록 길어진다는 것은 한국어를 쓰는 경우에도 자주 보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희한한 논리를 내세워 내 마우스 워시 사용을 디스커리지한 잰 아줌마 덕분에, 나는 가글 사용에 대한 고민에 더해, 인간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좀더 본질적인 고민을 하나 더 안게 되었다. 이렇게 착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간호사가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긴 하지만 그녀의 말은 논리가 안 되고,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아 참, 치간칫솔은 적극 권장하더라. 이것도 순수한 치의학적 조언인지는 의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