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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들풀의 미디어 뒤집기

[밖에서보기] 실리콘 밸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포린 폴리시> 9-10월호에 구글 CEO 에릭 슈미트와 가진 짤막한 인터뷰가 실렸다. 실리콘 밸리 이야기다. 이번호 <포린 폴리시>는 도시 특집인데, 세계에서 가장 아이디어가 넘실거리는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의 특성에 대해 슈미트에게 들어본 것.

슈미트는 실리콘 밸리가 탄생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강력한 연구 중심 대학들, 둘째 자유롭고 창조적인 문화, 셋째, 젊은이들을 유인하는 요소 등이다. 날씨가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하는데, 실리콘 밸리 지역의 날씨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슈미트는 다시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똑똑한 사람들이 넘치고 국제화 감각이 있을 것, 이는 언제나 중요한 조건이다." 슈미트는 이런 조건만 갖추어져 있다면 세계 어디서든 제2, 제3의 실리콘 밸리가 등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이런 잠재력을 가진 곳으로 꼽은 곳은 영국 캠브리지, 뉴욕, 상하이, 인도 방갈로르 등이다. 캠브리지에서는 이미 벤처 캐피털들이 크게 일어난 바 있다. 뉴욕은 날씨라는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요소가 있고 자본의 뒷받침도 강력하다는 점을 꼽았다. 상하이는 베이징에 비해서 대학의 뒷받침이 약하지만 여전히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고, 방갈로르는 대학의 연구력과 정부의 지원에 의해 성장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 인터뷰를 읽고 있자니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가 싶어서이다. 세상이 다 실리콘 밸리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인간의 창의를 재산으로 하며 전개되는 새 시대의 대명사인 실리콘 밸리와 우리를 비교하자니 앞날이 별로 밝아 보이지가 않다.

강력한 연구 중심 대학들? 한국 대학의 국제 랭킹 따위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한국 대학은 취업 준비소가 되다 못해, 기업의 수습 사원 교육장 같은 꼴이 되고 있는 판이다. 슈미트는 취직이 잘 되는 대학이 아니라 연구 중심 대학을 이야기한다. 기업에서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인재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오래 먹여 살리는 힘은 연구실에서 나온다. 기초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당장 돈이 안 되는 데 매달리는 (대학 말고 누가 이런 일을 할 것인가) 저력이 쌓여야 그 힘을 배경이 된다. 슈미트뿐만 아니라, 실리콘 밸리의 CEO들치고 이런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 당국을 비롯한 전 사회가 어떻게 하면 젊은 세대의 머리를 효과적으로 박제화시킬 수 있을까에 총매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온갖 빌미를 대고 구실을 붙여,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입에 족쇄를 채우고 처벌하고 불이익을 주는 세상 아닌가. 자유로우면 경찰 조사를 받고 소송을 당하는 나라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인 문화는 공염불조차도 되지 못한다.

젊은이를 유인하는 요소? 무엇으로 한국에, 혹은 한국의 특정 지역에 젊은이들을 유인해 올 수 있단 말인가. 있던 젊은이마저도 기회만 있으면 빠져 나가려고 하는 나라에 말이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다 음침한 구석방에서 취업 준비나 고시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 나라, 제 나라 똑똑한 젊은이들은 외국에 다 빼앗기고 외국 똑똑한 젊은이들은 데려다가 3D 작업장에나 처박는 나라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실리콘 밸리 좋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좋은 줄은 안다. 게이츠나 잡스가 "나와야 한다"니, 이들을 자궁에서 뽑아낼 것인가. 게이츠나 잡스는 당위에 따라 나오는 게 아니라, 저런 배경이 갖추어져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잉태되고 성숙하여 세상에 나오는 것이지 않은가.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 시절에 내놓은 공약 중 과학 기술 분야의 핵심은 '과학비즈니스 벨트' 조성이라고 한다. 실리콘 밸리를 능가하는 '한국형 실리콘 밸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라는데, 모태도 없이 대체 어떻게 애를 낳을 작정인지 궁금하다. 아니나 다를까, '자급자족으로 자기 완결성을 가진 인구 40만의 도시'를 잇달아 만들어서 벨트를 조성한다'는 게 이 구상의 내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기초과학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초과학의 대규모 투자 이전에 부동산 투기꾼들의 대규모 투자가 먼저 이루어질 게 틀림없을 듯하다.

제3, 제4의 물결이 몰아치고 산업의 구조가 크게 바뀌고 있는데도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사고를 하고 있는 한, 한국이 슈미트의 실리콘 밸리 잠재 지역 리스트에 들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실리콘 밸리처럼 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지구 온난화든 천지 개벽이든 큰 일이 벌어져서, 한국의 날씨와 환경이 지상 유일의 파라다이스처럼 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들이 좀 모여 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