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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스마트폰 시대의 주체화

이택광 경희대 교수

애플이 생산하는 기기들은 기계의 차원을 문화의 맥락으로 옮겨 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는 적극적으로 공학적인 개발에 인문학적인 상상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혁신적 기업인으로서 잡스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묘사하고 있는 ‘고전적인 자본가’의 형상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투자와 생산을 통해 자본의 축적을 도모하지 않는 ‘수전노’를 비난하는 그 초기 시장자유주의의 화신인 ‘젠틀맨’을 잡스는 21세기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부활시키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생산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기업에 투자되는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시장의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다양한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이런 까닭에 자본가의 모든 행위는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고, 자본가 자신의 사적 소비는 자본의 축적에 대한 도둑질로 간주되는 것이다. 자본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은 근대적인 관점에서 자본가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척도라고 할 수 있는데, 잡스를 비롯한 ‘인문적 경영인’이 내세우는 ‘윤리적 기업운영’의 원리는 이런 초기 자본가의 미덕으로 회귀하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아이폰 4G 한국 예약판매가 시작된 18일 서울 광화문kt올레스퀘어에 마련된 접수창구에서 시민들이 제품을 구매하고 있다.

말하자면, 애플 (또는 구글) 같은 ‘신기술 기업’이 내세우는 혁신이나 창조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초기 자본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역동성을 되살려내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푸코가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논했던 “인적 자본”에 대한 관점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푸코는 인적 자본에 대한 강조야말로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애플의 노선은 사회를 시장의 논리로 재단해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아이폰의 출현은 단순하게 특정 기업 제품의 마케팅 전략으로 축소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아이폰은 각기 따로 놀고 있던 매체환경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미디어 컨버전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융합의 끝에 ‘주체화’를 놓음으로써 아이폰은 돌연 인문학적 논의의 장으로 기술의 문제를 진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이폰이 구축하는 환경은 ‘시간의 소멸’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환경은 인터넷의 출현과 더불어 일찌감치 예고되던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이라는 전무후무한 환경은 “보면서 동시에 보여주는” 주체화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입증하는 조건을 만들어내었다. 누구도 이 ‘투명한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탈출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상상의 공간이 괴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실재의 충동이 매끄러운 이미지의 은폐를 균열시킬 때이다. 인터넷에서 발견하는 ‘마녀사냥’은 이런 충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은 이런 인터넷의 환경을 ‘무선통신’이라는 영역과 통합시키는 장치이다. 아이폰이 스마트폰의 선구적 장치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융합의 범주를 최초로 구상해서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폰은 주체화에서 가장 중요한 ‘거울단계’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매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출현이 인문학에 제기하는 도전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과연 스마트폰을 둘러싼 현상은 진지한 인문학적 문제일 수 있을까? 실제로 인문학의 출현은 오랜 연원을 갖는다. 이오니아학파의 소피스트리를 비판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다른 앎’을 주장하는 순간, 인문학은 탄생했던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넝마를 걸치고 통 속에서 살았던 까닭도, ‘최선의 상태’만을 학문의 덕목으로 여겼던 소피스테스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야말로 아리스토파네스가 조롱조로 이야기한 것처럼 ‘소크라테스하기’를 몸소 실천하면서, 인문학이라는 것이 세속의 질서와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스마트폰과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선뜻 연결해서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하이데거주의의 영향이 여전히 인문학적 사유에 도저하게 작용하고 있는 분위기에서 기술을 인문학적인 탐구의 영역에 놓는 것 자체가 그렇게 썩 인문학자에게 어울리는 일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인간 주체에 대한 해명에 있다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너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을 사랑하는 출발점이라고 했을 때, 이때 무지의 인지는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이지 ‘비판’이 아니다. 문제는 대상 없는 공허한 비판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대상으로 인문학의 관심을 돌려세우는 것이다. 인문학은 비판적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비판인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사유의 형식 자체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사유의 형식을 ‘의심’이라고 규정했던 철학자가 바로 데카르트였다.

스마트폰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미디어의 조건은 주체에 대한 인문학의 관점에 중대한 도전을 제공한다. 네그리의 경우는 이런 환경을 긍정적으로 파악해서, ‘다중’(multitude)의 출현을 예견했고, 데리다 역시 인터넷과 주체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주체화의 과정과 연동하는 매체환경의 문제이다. 이런 상황은 일찍이 벤야민이 복제와 본래성(the authentic)에 대한 관계를 사유할 때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최근 주디스 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에서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 컨버전스 환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차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복제가 되는 순간, 그 대상은 본래적인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이런 논의를 확대해서, 스마트폰 환경에 적용해보면, 만인이 만인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부드러운 공간’은 벤야민과 버틀러가 주장하는 ‘복제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주체화의 문제는 ‘거울단계’를 전제한다. 그 거울이 언어이든, 문화적 규범이든, 우리는 사회적인 구조에 우리를 ‘비추어 봄’(mirroring)으로써 주체를 정립한다.

이 주체는 ‘정립’되긴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인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체는 언어 속으로 ‘떨어짐’(falling)으로써 나타난다. 따라서 주체는 공간적이지만, 초시간적이다. 한번 나타난 주체는 끊임없이 반복 복제된다. 말하자면, 언어화라는 상징적 거세를 통해 사회로 진입한 주체는 최초의 원본 주체를 복제하면서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복제의 과정을 통해 주체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맥락에서 주체와 환경 사이를 부유하며 ‘정치화’한다.

스마트폰의 환경은 이 복제의 과정들에 직접성을 부여한다. 나의 과거는 삭제되지 않고, 또 다시 복제되어서 귀환한다. 연예인의 과거사들이 영원히 반복해서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매일 목격하지 않는가? 이 복제의 과정을 통한 주체화야말로, 정치적 내용 없는 형식의 정치성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스마트폰과 트위터라는 새로운 인터넷 통신수단의 만남은 이런 복제의 정치화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블로그에 비해 트위터는 즉흥적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이다. 실시간 대화를 통해 원격화되어 있는 상대방과 교감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겠지만, ‘보는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히스테리적 주체의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스마트폰이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기계장치가 주체화의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스마트폰이 만들어내는 주체는 히스테리적이다. 라캉에 따르면,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내화한 주체이기도 하다. 타자의 결여에 자신의 욕망을 일치시키는 히스테리적 주체야말로 복제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주관적인 것’을 변화시키는 주체이다. 강박적 주체와 달리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인의 욕망에 관심을 보인다. 이 관심은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라기보다,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는 핑계 자체를 갈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스마트폰이 만들어내는 환경은 타인의 욕망을 훔쳐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행위를 더욱 강화하는 조건이다. 욕망의 속성은 끊임없는 그 대상의 교체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은 변화무쌍하다. 일정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쾌락원칙에 근거해서 우리는 안전한 욕망만을 인준하려고 하지만, 병든 과잉의 욕망은 선을 넘어가기 일쑤이다. 금지는 항상 과잉의 욕망에 위협받고, 스마트폰은 이 위협의 조건을 더욱 강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스마트폰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더욱 가속화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 없는 주체화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타자 없이 홀로 서는 주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히스테리적 주체의 발화는 언제나 타자에게 의존한다. 무엇인가 발화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요구(demand)의 양상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아이폰을 사용하세요”라는 구조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오직 말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침묵할 수가 없다. 히스테리적 주체가 묻는 것은 단 하나이다 -- “나는 누구인가요?” 그리고 이 질문은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내포한다. 그러나 타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할 수가 없다. 따라서 히스테리적 주체는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에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아야만 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을 전제한다. 이런 구분이 가능한 까닭은 언어 때문이다. 이 언어의 구조 위에서 히스테리적 주체는 욕망의 변증법을 작동시킨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앎은 언제나 모호하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대상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이 앎의 모호성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이런 시도는 앎의 한계까지 주체를 한껏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진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욕망을 지향시키고, 마침내 그 한계에서 과잉의 차원을 드러내는 주체인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주체야말로 히스테리적 주체이다. 이 주체는 자본에 지배당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한다. 인터넷은 자신을 타자에 복속시킴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려는 히스테리적 주체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실시간 인기 검색어’가 대표적인 실례이다. 또한 트위터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타자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는 히스테리적 주체의 속성을 체현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이 모든 속성을 직접성의 ‘시간 없음’(u-chronic)에 위치시킨다. 스마트폰은 주체가 완벽하게 타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인 셈이다.

인문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스마트폰 자체는 아닐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기와 매개하는 주체화의 과정에 대해 인문학은 사유할 수 있다. 스마트폰은 공간적으로 가까운 관계와 먼 관계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를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하게 스마트폰이라는 기계장치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디지털 네트워킹과 연동하는 주체화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이 상황은 반인문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문학에 대한 요청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라는 인터넷 네트워킹의 방식은 ‘타자를 향해 수다 떨기’라는 주체화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의 행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확인의 행위가 곧 즐거움의 원천이고, 공동체의 ‘교환’을 인준하는 쾌락원칙의 발현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끊임없이 붕괴시키는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기 위한 방식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은 이 관계의 대체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고 있는 중요한 변화의 일부분이라고 하겠다.

인문학은 이런 변화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단순하게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인문학을 공부해야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통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주체라는 ‘틈’이다. 타자 없이 존립할 수 없는 주체의 자리는 언제나 인문학에 대한 요청을 마련해놓고 있다. 스마트폰이 히스테리적 주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한, 인문학 또한 이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양해를 얻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