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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시장 왜곡하는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행정지도 발언

장덕진 서울대 교수 사회학

복지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세가 도를 넘고 있다.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들고 나오고, 민주당이 마침내 중도개혁 대신 보편적 복지를 당헌에 못박았다. 어차피 선거전략이지만 그나마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를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데에 60년이 걸렸다. 현실을 보면, 가뜩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 최하위 수준의 복지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국가를 대신해 힘겹게 그 빈자리를 떠받치던 가족의 기능이 약화되고 거기에 양극화까지 심화되니 친서민 복지정책에 대한 요구는 엄청나게 크다.

 이러한 객관적 현실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복지정책에 대한 보수진영의 불만은 만만치 않다. 대통령의 공정사회론에 대한 비판은 때로 격정적인 배신감의 토로로 읽히기조차 한다. 그들의 걱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공정한 사회의 내용이 결국은 서민층에 대한 직접 지원으로 흐를 것이고, 이것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근본적 추동력인 동기부여를 훼손할 것이고,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더 효율적인 기업이 성공하고 덜 효율적인 기업은 퇴출되는 시장원리를 왜곡할 것이며, 결국 정치적인 포퓰리즘으로 인해 나라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친서민과 복지와 공정사회는 자원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서민들에게로 돌려놓을 것이고, 거대자본이 골목길 상권까지 빼앗아갈 정도로 열심히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할 동기는 조금이나마 줄어들지도 모른다. 복지란 근본적으로 시장의 야만성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된 국민들을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시장원리를 왜곡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복지가 가져올지도 모를 시장의 왜곡과 동기부여의 훼손에 대해 그리도 분개하는 그들이 그보다 훨씬 더 큰 왜곡과 훼손에 대해서는 한번도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정권의 출발부터가 그러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정치적 레토릭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 신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하겠다면 친기업이 아니라 친시장을 하겠다고 해야 한다. 친기업과 친시장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정부가 기업의 편을 드는 순간 시장원리는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도 이 담대한 시장왜곡 선언에 대해 분개하는 보수인사를 본 적이 없다.

최시중 방통위원장. 경향신문자료사진 by 우철훈기자

 이론적으로 따지면 시장 중의 시장은 금융시장이고 그중에서도 핵심은 기업지배권 시장이다. 이것이야말로 비효율적 경영자를 걸러내고 뛰어난 경영자를 보상하는 ‘시장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출자관계로 재벌의 지배구조는 심각한 상황인데, 그나마 현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재벌 견제 기능을 떼어버렸다. 이 엄청난 시장 왜곡에 대해서도 그들 중 아무도 분개하지 않았다. 공기업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민영화는 과거의 성공사례들이 예외 없이 소유분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경험을 모두 무시하고 거대자본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현실이 될 경우 이미 심각한 독과점의 폐해는 지금의 두 배 이상이 될 터인데, 이 공포스러운 시장 왜곡에 대해서도 그들은 분개하지 않는다.

 엊그제 국정감사에서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법적 근거가 없는 행정지도를 통해서라도 종편에 황금채널을 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문시장의 독과점이 방송시장으로까지 이어질 것이고, 결국 국민들은 더 비싼 돈을 내고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앵무새 같은 목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역시 그들 중 아무도 언론시장의 왜곡에 대해 분개하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시장 왜곡들에 비하면 복지가 가져올지도 모를 시장 왜곡은 작고도 작다. 그러니 박완서 선생의 아름다운 문장을 뒤틀어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너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