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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정동칼럼]방송법은 정쟁거리가 아니다

공영방송 사장은 선거 승리의 전리품인가? 집권의 수단인가? 정쟁의 도구인가? 세계 어느 나라의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방송사 사장을 가운데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가?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빨리 방송법을 개정하자고 한다. 개정안 처리가 보장되지 않는 한 임시국회에도 불참하겠다고 한다. “민주당이 제출해 놓은 법안대로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처리하자는데 왜 미적거리냐며 불만이다. 언뜻 들으면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이다. 이 법안이 발의된 후 2년 가까이 개정은커녕 논의도 피하면서 시간만 질질 끌었던 당사자들이 바로 자기 자신들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야당 시절 방송법 개정을 부르짖다가 슬그머니 목소리가 작아진 민주당과 한 뼘도 다르지 않다.

 

서있는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이 달라진다면, 이 사안이 정쟁거리라는 뜻이다. 방송의 공영성이니 언론의 자유니 하는 것은 단지 명분일 뿐, 사실은 민주당이건 한국당이건 공영방송을 ‘승리’와 ‘집권’을 위한 절차 정도로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정치권은 공영방송이라는 존재를 이렇게 하찮게 여긴다. 다수결이냐, 3분의 2 이상이냐? 11명이냐 13명이냐? 이런 숫자 몇 개 때문에 고함지르고 머리에 띠 두르고 바닥에 드러누우며 30년이 지났다.

 

단순하게 정리하자. 지금의 방송법은 악법이다. 고쳐야 한다. 이 악법 제정의 주역이었던 이들이 먼저 사과를 하면 더 좋은 출발이 될 수 있겠다. 어떻게 고칠 것인가? 이미 많은 고민과 논쟁이 있었다. 국회의원 몇몇이 속닥거려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연구 및 논의의 결과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 자료들이 개정안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작년 10월, 방송·언론계와 학계, 법·경영 분야, 그리고 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18명의 전문가가 모였다. 5개월 동안, 지난 몇 년간의 방송법 관련 논의들을 총정리하고 쟁점들을 다시 점검했다. 그리고 개정 방송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3월 말 발표했으니 보고서가 나온 지 거의 50일이 지났지만 국회의원들이 이 ‘방송미래발전위원회’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살펴본 흔적은 없다.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여전히 6명이냐 7명이냐 가지고 싸울 뿐이다. 18명 중 하나로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고 화가 난다. 공영방송 이사회를 ‘제대로’ 구성하고 이사회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사장을 선출한다면 숫자는 부차적이라는 것이 보고서의 전제이다. 당연하고 상식적이다. 이사회 구성은 반(反)정치후견주의, 합의주의, 상호견제라는 세 가지 원칙을 따른다. 소위 ‘중립지대’ 이사가 이사 총 정원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정파성의 직접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며, ‘중립지대’ 이사 추천과 임명은 행정부(방송통신위원회)와 국회 간 상호견제가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세부사항이야 국회 내 논의과정에서 조정될 수 있겠으나, 법안 골격은 이미 튼튼하게 완성되어 있는 셈이다.

 

공영방송이 정치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업이 하나 더 남아있다. 바로 방송의 제작 자율성을 보장하는 일이다. 심지어 사장이 정파적 인물이라 하더라도 방송의 내적 자유가 제도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면 공영방송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방송미래발전위원회’ 보고서의 두 번째 제안이다. 지상파 및 종합편성·보도전문편성 방송사업자에게 사업자 대표와 종사자 대표 동수로 편성위원회를 구성·운영하도록 규정하며, 방송사 간부의 임명 및 수행 평가에서 종사자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를 명문화하자는 것이 보고서의 제안이다.

 

진정성은 자신이 가진 힘과 권한을 내려놓음으로써 드러난다. 방송법을 고쳐도 고쳐도 악법으로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입법권자인 국회의원들이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법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명감도 전문성도 포기한 채, 시장바닥에서 흥정하듯 숫자 하나 문구 하나 주고받으며 법률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재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은 시민의 직접참여 확대를 골자로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단, 시민 참여는 시청자위원회의 위상 및 권한 강화와 합리적 구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시청자위원회가 이사회를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당리당략을 내려놓고 이 정도 큰 그림에 동의한다면, 방송법을 빌미로 여야가 치졸한 기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누가 특별히 이익도 손해도 보지 않을 내용이니 말이다. 그러니, 의원님들, 공영방송의 가치를 믿는다는 진정성을 보여주시라. 빨리 의사당에 모여 일이나 하시란 말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