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청춘직설]브런치 만들기와 파업

어느 백화점의 문화센터. 남녀가 뒤섞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닐장갑을 끼고 식빵을 썰고 채소를 다듬고 드레싱을 뿌리면서 뭔가를 만들고 있다. ‘내가 만드는 브런치’라는 이 수업의 실습 메뉴는 바로 참치 샌드위치. 브런치 메뉴치고는 평범한데 이 아침에 이곳에 모여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들은 평범한 수강생이 아니라 직장인, 그것도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육 발령을 받고 이곳으로 출근한 MBC 아나운서, PD, 기자들이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국장부터 입사 5~6년차 PD까지 직급과 성별은 다양하지만, 회사의 명령에 따라 매일 방송국이 아닌 이 아카데미로 출근해 오전과 오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처지다. 세계 언론사에 유일무이할 이날의 ‘브런치 수업’에 참여했던 MBC 임명현 기자는 그날의 기록을 자신의 책 <잉여와 도구>에 남긴다. ‘2012년 파업에 참가했던 언론노동자들이 어느 날 회사의 명에 의한 교육으로 브런치로 참치 샌드위치를 만들었다’고….

 

영화 <공범자들> 스틸 이미지

 

모멸적인 ‘브런치 교육’이 이뤄진 것은 2012년, <잉여와 도구>는 2017년 9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5년이 흐른 지금, 이 ‘웃픈’ 상황은 달라졌을까? 현실은 때론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반전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 같을 때가 있다. KBS와 MBC의 상황이 꼭 그렇다. 두 방송사는 지난달 4일부터 방송의 공정성·독립성 확보와 현 경영진 퇴진을 목표로 총파업을 시작했다. 대형 간판 예능이 줄줄이 결방되고 드라마 촬영 중단과 첫 방송 연기는 물론 크고 작은 방송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심지어 MBC의 경우 오전과 저녁 뉴스를 라이브가 아닌 녹화방송으로 진행한다. 이렇게 방송사상 초유의 사태인 ‘녹화 뉴스’가 방송되고 있는데도 “MBC 뉴스 안 본 지 오래”라는 무관심의 늪에 빠진 것이 더 문제다.

 

양 방송사의 파업은 벌써 40일이 넘게 지났는데 여전히 답보 상태다. “라디오 파업하니 멘트 없이 음악만 나와서 좋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TV를 보지 않아도 워낙 많은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하고 발언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진 언론 환경 변화도 있겠지만 최근 이뤄진 한 조사에서 가장 불신하는 매체에 MBC와 KBS가 나란히 1위(22.4%)와 3위(9.7%)를 차지할 정도로 신뢰를 잃은 때문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곧 해결되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 건 아닐까? 나 역시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파업이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땜빵’용인 프로그램이 계속되는데도 KBS 경영진은 사퇴 요구를 일축했고, MBC는 특별근로감독 결과에 반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뿐이다. 그나마 ‘이명박근혜’ 정권의 언론장악 실태를 고발하는 영화 <공범자들>이 2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과 매주 열리는 ‘돌아오라 마봉춘(MBC) 고봉순(KBS) 불타는 금요일 파티’에 참여하고 응원하는 시민들이 작은 희망이고 위안이다.

 

영화 <공범자들>은 이명박근혜 시절의 언론 탄압에 부역한 자들을 만나러 갔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하는 최승호 PD를 계속해서 비춘다. 여전히 휘황찬란한 시상식에 귀빈 자격으로 앉아 있는 그들에게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당하고 나오던 최 PD는 맥빠진 목소리로 “잘들 산다, 잘들 살어”라고 내뱉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의 짧은 혼잣말과 “방송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와서 이러면 안된다”며, 최 PD를 ‘훠이훠이’ 내쫓아버리는 현직 경영진의 손짓이 잊히질 않았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해고자들과 이들의 자리는 바뀌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합법적으로 대응하면서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무력감마저 안긴다. 망가뜨리는 건 금방이지만, 복구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연초에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엉망으로 망가진 회사, 바로 MBC에 다니는 친구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친구는 그동안 그림 그리기, 서예, 요리, 일본어 등 각종 취미 계발로 회사 생활을 말 그대로 ‘버텨’ 왔다. 오늘도 파업 중일 그 친구가 더 이상 다른 취미를 갖지 않게 되길, 유능하고 성실한 언론인으로서 다시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길 친구이자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