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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혁명적인, 포스트잇 미디어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심보선 시인이 구의역에 붙인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이라는 시자보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아홉 살 청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이라는 세 음절을 읽는 순간 왈칵 눈물이 흐른다. 눈물은 실시간으로 전송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시자보가 공유된다. 신문, 방송 등 기존 미디어에 보도되고 이 뉴스는 다시 링크를 타고 확산된다. 너무나 슬퍼서 슬픔조차 느낄 수 없었던 시간을 그린 그의 대표작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순식간에 전이된다. 공간의 경계도 시간의 경계도 무너진다. 동시에 미디어의 경계도 무너진다.

두 개의 질문이 떠오른다. 인기 있는 중견 시인인 그는 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이라는 시를 오마주하는 형식을 취했을까. 또 시인은 왜 기존 미디어를 선택하지 않고 손수 쓴 시자보를 들고 구의역에 갔을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시인은 작가적 권위를 내려놓고, 프레임에 갇힌 특정 미디어의 장벽을 넘어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모이는 그곳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이라기보다는 슬픔에 잠 못 이룬 한 명의 시민으로서 청년의 비극적 삶을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빵과 밥과 국화꽃이 놓여 있고 ‘굶지 말고 밥 꼭 먹고 다녀라’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있는 그곳에 함께 있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 강남역에서 전남 신안까지, 서울 구의역에서 경기도 남양주까지 장소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다.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과 성폭력에 대해 이처럼 공론화한 미디어가 존재했었나. 위험의 외주화와 살인의 제도화에 대해 이처럼 강력하게 분노할 계기를 만들었던 미디어가 있었나. 공간에 놓인 포스트잇은 가장 힘센 미디어가 되었고 포스트잇 미디어에 담긴 메시지들은 기존 미디어 편집국의 결정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미디어도 언제까지나 남성권력의 입장만 옹호할 수는 없었다. 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스크린도어 사고는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기 시작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포스트잇 미디어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여성은 안녕하십니까. 비정규직 청년은 안녕하십니까. 질문은 확대된다. 자본주의는 안녕하십니까. 민주주의는 안녕하십니까.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안녕하십니까.

지난 한 달간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 빅데이터 하루 언급량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미디어’는 ‘포스트잇’이었다. 강남역 여혐 살인이 일어난 이튿날인 5월18일 하루 포스트잇을 언급한 문서는 9만6773건이 검색됐다. 이는 아이돌 그룹 출연으로 언급량을 늘린 5월13일 KBS 언급량 5만9226건보다 많고 5월23일 조선일보 1만9761건보다 많다. 심지어 5월18일 네이버 언급량 7만6457건보다도 많았다.


시민들이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_경향DB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최근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이라는 책을 펴냈다. ‘어떤 애도와 싸움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난 5월23일, 우천이 예보되면서 이곳의 포스트잇은 보존을 위해 서울시청과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으로 옮겨졌다.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들은 이 포스트잇이 옮겨지기 직전, 강남역 10번 출구의 외벽에 붙은 포스트잇 1004건을 일일이 촬영한 후 문자화하는 전수조사를 진행했다. 사진으로 찍고 타이핑을 하고 언어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기록한 것이다. 포스트잇은 소셜미디어를 넘어 신문, 방송을 타고 이제 그 자체로 출판 미디어의 공동저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인세 전액은 전국의 공공도서관에 다시 책으로 기부되고 전자책은 무료로 배포된다고 한다.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은 “이들에게 여성주의를 ‘가르칠’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20~30대가 대부분인 이들은 이미 여성의 현실과 여성주의적 사유를 체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런 것이 “네가 나야”라는 진술이나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잖아” 같은 표현, “‘오빠가’ ‘남자가’ 지켜주는 사회는 필요 없습니다. 여자 혼자여도 안전한 사회가 필요합니다” 같은 주장은 이론적 사유를 넘어 상호작용에 기반한 실천적 호소로 들린다.

미래학자 피터 힌센은 책 <뉴 노멀>에서 “콘텐츠의 시대에서 콘택트의 시대로의 이행”을 선언했다. 콘텐츠 그 자체보다 상호작용이 더욱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반응이 메시지다”로 이행한다. 오롯이 반응성 그 자체인 포스트잇 미디어가 ‘혁명적인’ 이유다. 나아가 기존 미디어가 오래된 뉴스룸의 특권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보선 시인의 시자보는 이렇게 끝난다.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유승찬 | 스토리닷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