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대하 막장 드라마라고 표현했던 대통령의 광범위한 국정농단은 그 규모와 양상으로 미루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이색적인 말들이 양산되고 있다. 한 예로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한 초등학생은 이번에 자괴감이란 어려운 단어를 배우게 해준 대통령에게 고맙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이번 기회에 하야나 ‘농단(壟斷)’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게 되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정권 출범 초기 ‘비정상의 정상화’란 미명하에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적폐(積弊)’란 단어를 애용했다. 대통령은 각종 연설에서 공교롭게도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우주, 혼, 기, 정신 등의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통치 언어는 지지자들에게 전이되어 또 다른 광기의 언어를 낳는다. 통치 권력이 정당성을 상실하고 국내외적 조롱과 공분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에도 이에 대응하는 언어 역시 이성적이기보다는 격앙된 적개심과 비뚤어진 방어기제가 혼재된, 혹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거나 건전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3일 오후 강원 춘천시 새누리당 김진태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 시민들이 촛불을 켜 놓았다. 가로수에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김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리본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가령 김진태 의원의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이 불면 다 꺼진다’란 말이나,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유영하 변호사의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달라’, 또는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의 ‘100만명이 모였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겠고 침묵하는 4900만명이 있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박대출 의원이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논개 정신’을 언급하며 ‘의혹이 대한민국을 삼켰다’고 한 것도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논리의 사례다. 이런 말들이 버젓이 사회적 공론의 형식으로 등장하는 현실을 보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시스템의 개방성이 혐오나 전체주의의 언어와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와 시민들이 후안무치한 권력의 비상식과 비논리에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했음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깊다. 많은 외신들이 시위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논평했듯, 수차례에 걸친 평화로운 시위 문화와 창의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에서 새로운 사회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길어올릴 수 있다.

 

현재 영국, 미국을 비롯해 전 지구적으로 정치와 민주주의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여기에서 파생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차분하고 용기 있게 대처하고 발화하는 다중 정치의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동시에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

 

양파 껍질 까듯 매일 새로운 속살이 나오는 이번 게이트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기인하지만, 정경유착과 정언유착 등 한국 사회의 구조화된 적폐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동시에 불안해 보이는 현 시국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누적된 우리 사회의 비정상을 정상화하고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와 체제를 교체할 수 있는 호기이다. 다만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동상이몽적 현실 진단과 정치 공학적 계산을 경계해야 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천변만화에 ‘이제 이 정도면 되었지’라고 타협하거나 긴장을 늦추어선 안된다. 그리고 자유롭고 성숙한 시민으로서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현 상황을 주시하기, 이성적이고 평화적이지만 때론 급진적으로 발화하고 실천하기,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유쾌한 연대와 협업을 이루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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