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최근 신문 지상에 ‘미디어렙’이란 낯선 용어가 간간이 등장하고 있다. 이 생소한 용어의 뜻은 ‘방송광고판매대행사’다.
광고주인 기업이 방송사와 직접 영업관계로 연결되면 보도를 빙자한 홍보성 프로그램과 기사가 넘쳐나거나, 광고철회 압박을 동원한 기사삭제 압력 등이 행사될 개연성이 높다. 오락프로그램 비중이 높아지고 교양프로그램들이 사라지거나 외곽지대로 몰리는 등 그 폐해가 결국 시청자들에게 미치게 된다.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공적 규제장치가 바로 미디어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라는 미디어렙이 KBS, MBC, SBS 등 약 2조원 규모의 지상파 광고판매를 홀로 대행해 왔다. 그러나 독점상태를 해소하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에 이어 조·중·동·매경 종편채널이 올해 안에 방송을 시작하게 되는 사정과 맞물려 재편이 시급한 상황이 된 것이다.
과연 어느 매체들이 이 시스템의 규제를 받게 할지, 몇 개나 만들지, 누구의 소유로 할 것인지 등이 핵심이다. 현행 KOBACO체제가 지역방송과 종교방송 등 취약매체들에 일정정도 광고를 배분해 주는 역할도 병행해온 터라 방송광고체제 개편은 전체 미디어 생태계의 판도를 좌우할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도 여태껏 미뤄놓다 뒤늦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국회 문방위의 풍경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한나라당의 입장은 한마디로 ‘조·중·동방송 열외론’이다. 지상파방송만 직접 영업을 못하게 묶고, 취약매체 지원도 도맡게 하자는 것이다.
이미 유명 예능PD 다수를 영입해 나름의 경쟁력을 갖추고 최대 재벌 삼성과의 특수관계를 배경으로 삼는 J종편, 안보선정주의를 주무기로 한국판 폭스TV를 만들어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는 전략에다 기업들의 약점리스트를 구비하고 있다고 알려진 C종편…. 그들이 직접 영업을 원하기 때문이다.
조·중·동방송 키우기를 4대강 사업 같은 국책사업으로 여기는 여당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싫으면 법을 만들지 말든지”하는 식이다. 현재 종편채널의 광고영업에 대해 별도의 규정이 없으니 그냥 놔두면 자연스럽게(?) 직접 영업을 하게 된다는 타산이다.
그에 맞서 민주당은 ‘예외없는 의무위탁’ 다시 말해 조·중·동방송도 미디어렙 체제에 묶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KBS, MBC, SBS와 마찬가지로 전체 시청가구의 86%를 커버하는 전국방송이며, 보도기능 등 편성장르에 차이가 없는 만큼 ‘동일 서비스에 대한 동일 규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인즉 옳다. 문제는 이러한 입장을 끝까지 관철할 만한 역량과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본격적인 토의와 협상을 진행하기도 전에 “현실적으로 2~3년은 종편 직접 영업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미리 꼬리를 내리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이 SBS미디어홀딩스의 광고판매대행사 출범에 항의하는 시위 l 출처: 경향DB
결국 시민사회가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다. 조·중·동방송을 노골적으로 후원하는 세력과 조·중·동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인들 간의 협상에 맡겨놓기에는 그 후과가 너무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조·중·동방송이라는 괴물은 손쉽게 먹이를 조달해 날로 커지는 반면, 지역방송과 종교방송 그리고 건강한 신문들이 궤멸적 타격을 입어 벼랑으로 내몰리며, 수지가 악화된 지상파 방송들마저 상업주의로 치닫는 미디어생태계의 대재앙. 그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찌 될 것인가? 노동자와 서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어느 방송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대중적 저항을 만들어냈던 힘은 우리 시민들의 상상력이었다. 농성장에 희망버스를 타고 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우리 시민들의 열정이었다. 이제 조·중·동방송에 대한 특혜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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