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 | 경원대 교수·신문방송학
영국 최대의 미디어기업 총수인 루퍼트 머독이 168년이나 된 계열 신문사를 최근 자진 폐간했다. 해당 신문사의 경영자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문사가 전화도청과 해킹 등 부적절한 취재관행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의혹으로 불거지고 있다. KBS 기자가 야당의 비공개회의를 도청하고 그 내용을 여당 의원에게 넘겨줬다는 의혹이다. 국회 출입기자의 83%는 KBS가 도청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의혹이 보도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KBS 책임자의 납득할 만한 해명은 나오지 않고, 경찰은 수사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영방송 KBS가 정말 그랬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 방송법 제43조부터 제68조에 걸쳐 설치 근거와 공적 책임, 재원 등이 규정되어 있는 국가기간방송 KBS가 그런 비열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설립한 KBS가 설마 그랬을 리가 있겠는가. 방송의 공적 책임,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하도록 되어 있는 기구인데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했을 리가 절대 없다.
그런데 자꾸 두려워진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지만 만약 이번 일이 사실이라면, 정말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이것은 공영방송의 존립 근거를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다. 수신료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매우 위험한 사건이다. 그동안 KBS 내부에서 일어났던 비민주적 대소사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문제의 심각성이 큰 사건이다.
머독은 개인 소유 신문사라서 자진 폐간을 결정했지만 국가기간방송 KBS에 대해서는 누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방송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위법사업자로 밝혀진다면 방통위가 어떤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인가.
시청자 입장에서는 위법성에 대한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KBS의 보도방송에 대해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해야 하는 것인가. 수신료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인가. 공영방송 폐지론을 거론해야 하는가.
KBS가 정녕 억울한 의혹을 받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스스로 밝혀야 한다. 경찰 조사만을 기다린다는 이해할 수 없는 대응 자세는 국민적 의혹을 확대시킬 뿐이다. 실제로 도청이 있었던 것인지, 정말 자료를 넘긴 것인지 한 점 의혹없이 밝혀내야 한다. 경찰보다 더 적극적으로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의혹이 의혹을 낳고 있는 상황에서 KBS 사장 이하 임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엄청난 의혹 앞에서 왜 함구하고 있는 것인가.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혹여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인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나갈 때마다 그들이 한결같이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왜 KBS 수신료를 내야 하는가이다. 다른 하나는 수십년간 냈는데 이제 안 내도 되지 않는가이다. 그럴 때마다 원론적 차원에서 공영방송의 특수성과 수신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쓴다.
전자의 질문에는 방송법에 명시된 공영방송의 소중한 책무들을 언급한다. 후자의 질문에는 방송법 제64조에 명시된 규정을 소개한다.
“텔레비전 방송을 수신하기 위하여 텔레비전 수상기를 소지한 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사에 그 수상기를 등록하고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를 납부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수신료 징수는 두 가지 요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타당성이 있다. 만약 이번 의혹이 사실이라면 수신료 납부 의무의 1차적 근거는 사라진다.
공영방송의 책무 이행이라는 전제 요건이 선결되지 않으면 수상기 소지라는 물리적 요건은 수신료 징수의 온당성을 상실한다. 더욱이 수상기 소지라는 물리적 기반은 이미 휴대폰이나 태블릿PC 등을 통한 TV 수신이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약 이번 일이 사실이라면, 정말 사실이라면, 국민 모두가 세금처럼 지불해온 수신료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 적십자 회비처럼 강제성 없는 재원으로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기로에 선 한국의 공영방송, 미래가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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