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조스 같은 사람을 찾으세요.” 이 무슨 맥 빠지는 답인가. 지난 5일 미국 워싱턴,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획으로 참석한 국제뉴스미디어협회(INMA) 세계총회장. 기자의 ‘전설’ 밥 우드워드가 끈질긴 투지, 발로 뛰는 취재와 같은 저널리즘의 정석을 역설한 뒤 객석의 한 젊은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미디어의 살림살이와 저널리즘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부자를 찾으면 된다니. 우드워드는 더 약을 올렸다. “난 지금 기자를 하지 않아 참 행운이다.” 이틀 뒤 방문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에서 만난 한 기자는 더 부러운 소리를 했다. “베이조스가 있어 행운이다.” 2013년 8월5일 아마존의 CEO 제프 베이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2억5000만달러를 주고 사겠다고 발표했을 때, 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라이언 치텀은 컬럼비아저널리즘리뷰에 “우리는 이제 좋든 나쁘든 몰락하는 신문을 억만장자가 구원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베이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경영하는 건 사업일까, 자선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라고 썼다.
2016년 5월 18일 워싱턴포스트가 워싱턴에서 주최한 한 행사에서 오너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와 마틴 배런 편집국장이대화를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
워싱턴 K스트리트로 새로 이사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 복도에 사주 제프 베이조스의 말 ‘위험한 것은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가 쓰여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
베이조스는 서서히 가라앉던 워싱턴포스트를 정말 구원했다. 그는 공언대로 140년 전통의 신문사를 미디어·기술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이 바뀌고 콘텐츠를 작성·배포하는 자체 시스템 아크(Arc)가 만들어졌다. 특정 독자를 겨냥하거나 세분화하고, 독자의 특성에 맞게 기사의 제목과 형식을 달리 만들고, 광고도 달리 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 툴이 생겼다. 200명이 넘는 기술팀이 만들어 낸 결과다. 무거운 구식 언론은 ‘엣지 있는’ 미디어가 됐다. 온라인 독자가 급증하면서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10월 웹사이트 순방문자 수에서 뉴욕타임스를 앞질렀다. 온라인 광고 수익도 매년 두 자릿수 퍼센트로 늘었다.
2015년 말 워싱턴포스트가 워싱턴 K 스트리트에 새로 마련해 이사한 편집국의 모습. 에디터들이 모여 있는 편집국 ‘허브’에는 실시간 속보와 독자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월이 설치돼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
지난 7일 찾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의 모던한 디자인은 실리콘밸리를 떠올리게 했다. 천장 일부를 터 8층에서도 7층 에디터들이 모인 ‘허브’가 내려다보인다. 허브는 독자 데이터가 돌아가는 데이터월로 둘러싸여 있다. 미디어 업계에서는 구조조정 소식이 끊이지 않는데 이곳은 사람을 더 채용한다고 사무실을 늘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베이조스가 워싱턴포스트에 돈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는 혁신의 엔진을 가져와 돌리고, 비전이 담긴 메시지로 편집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부러움은 이제 한쪽에 밀어두고 현실로 돌아오자. 우리에겐 베이조스가 없다. 그러니 베이조스 없는 길을 찾아야 한다. INMA 연단에 섰던 루시 퀑 로이터연구소 연구원은 베이조스를 찾지 못한 많은 ‘운 없는’ 언론을 향해 의미 깊은 조언을 남겼다. “미디어들은 최근 줄곧 실리콘밸리로부터 ‘반짝이는 새것’의 유혹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것들은 엄청난 자본을 가진, 언론과 전혀 다른 사정을 가진 기업에서 온 것이다. 우리의 변화가 옳은 방향으로 가려면 우리는 바로 우리의 조직에서 출발해야 한다.”
루시 퀑 로이터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6월 4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뉴스미디어협회(INMA) 세계총회에서 ‘왜 미디어 기업은 콘텐츠에 집중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국제뉴스미디어협회 |
퀑 연구원은 미디어의 변혁은 콘텐츠보다 조직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콘텐츠가 변화하려면 근본적으로 조직이 변화해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대다수 레거시 미디어들은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혁신’이라는 생각에 매몰돼 있다. 조직을 바꾸는 일은 차순위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새로 할 일을 추가하기만 하고 어떤 것도 관두거나 정리하지 않았다고 퀑은 지적한다. 조직을 바꾸려는 고된 과정 속에서 구성원들은 지쳐 나가떨어진다. 퀑이 지난해 펴낸 보고서 ‘디지털화하기(Going Digital)’에는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BBC, CNN 등 전 세계 18개 언론사 사람들의 생생한 고뇌의 증언이 담겨 있다. 퀑은 “이전 연구와 비교해 가장 놀란 것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언론사를 떠났는지 확인했을 때”라고 했다. 그가 떠난 이들에게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종종 같은 답을 내놨다.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조직에 다시는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베이조스를 찾을 수도 없고, 스스로 바뀔 방법을 찾지도 않을 때 닥칠 미디어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하다.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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