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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김정섭의 미디어토크

[미디어스타] 아사히신문 첫 외국인기자 안인주

· 뿌리깊은 차별 '면접담판' 뚫고 '다문화' 대변

어느 곳보다‘순혈주의’가 강한 일본 언론계에서 외국인 차별의 벽을 처음으로 뚫은 20대의 한국인 여기자가 종횡무진하고 있다. 

안인주 기자(27)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최초의 외국인 기자다. 올해로 창간 131주년을 맞은 <아사히>는 지난 2008년 공채를 통해 약 50명의 기자를 채용하면서 한국국적을 가진 안 씨를 받아들였다. <아사히>는 물론 일본의 주요 신문과 방송을 통틀어 외국 국적자가 기자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인의 경우도 혼혈인, 재일동포, 조선인 3세가 기자가 된 경우는 있지만 영주권이 없어 매 3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한국 국적자는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일본 언론계의 벽은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외국인 차별 의식만큼 높았다. 일본은 현재 브라질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많은 노동자와 이민자가 몰려, 한국 못지않게 이와 연관된 갈등과 사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 기자의 언론계 입성은 일본 언론계에서 드물게 다문화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 중인 진보적 언론 <아사히>의 실천적 의지와 진정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 기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7살 때인 1990년 회사원인 아버지를 따라 가나가와(神奈川) 현으로 건너갔다. 초·중·고교를 마친 뒤 대학만큼은 한국에서 다니고 싶어 귀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했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소수자인 외국인들이 처한 문제를 밀도 있게 조명하고 정책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란 가나가와 현 히라쓰카(平塚)시는 이른바 ‘보트 피플(Boat people)이 많이 사는 곳이다. 작은 배를 타고 전쟁이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한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 마을에는 인종간의 차별 의식이 만연해 있었고, 안 씨가 어린 시절 주변에서 목격한 여러 가지 사건들은 그녀에게 상처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는 일본 언론사 중 ‘열린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아사히신문>을 겨냥했다. 초중고를 일본에서 다녔으니 언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국적이 문제였다. 수소문해 보니 일본 언론사에 한국 국적자가 입사한 전례가 없다고 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까, 포기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냥 원서라도 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2008년 4월, 1차 시험(서류-필기)에 붙었다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에 붙어도 국적 때문에 결국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오자는 작정으로 시험장에 갔다.

그룹 토론과 기사작성, 실무진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데스크 1명과 평기자 2명이 들어온 면접에서 “우리가 당신을 뽑으면 어떤 점이 좋을까요?”란 질문이 나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험보기 전에 읽었던 <아사히>의 사설을 떠올렸다. 브라질 이주 노동자 등의 유입으로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자성을 촉구한 내용이었다.

“외국인을 단순히 값싼 노동력으로만 보지 말고 인격을 가진 이웃으로 받아들이자는 아사히의 사설에 감동해서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저를 뽑아주시면 그 사설이 주장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실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면접관들은 안 씨의 당당한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2차 시험 통과. 이어 중간간부 3명 앞에서 3대 1로 면접을 보는 3차 시험과 약 10명의 임원 앞에서의 보는 최종 면접도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면접관들은 하나같이“이 지원자를 꼭 뽑아야 한다”고 회사 측에 강력히 추천했다고 한다. 결국 <아사히신문>은 한국인을 기자로 채용함으로써 자사의 사설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증명했다.

                                                                    ▲ 안인주 기자

안기자는 2008년 9월부터 1주일간 연수를 받고 바로 일본 북동부 미야기현 센다이시 주재기자로 발령받았다. 주 임무는 선후배 20명과 함께 미야기 현과 경찰본부, 산하 24개 경찰서 등에서 사건 사고를 취재하는 것. <아사히신문>은 입사 후 지방에서 5~6년간 일하게 한 뒤 본사인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 등 4곳으로 이동하는 인사 체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안 기자는 앞으로 다른 지방으로 한 번 더 발령받아 약 2년 정도 더 일한 뒤 본사에 입성하게 될 전망이다.

첫 발령지인 미야기 현에서는 한국의 수습기자와 마찬가지로 매일 밤잠을 설치는 힘겨운 취재 행군이 계속됐다. 사건을 좇아 인구 100명밖에 안 되는 외딴 섬 에노시마(强度)를 찾는 등 도서벽지를 종횡 무진했다.
특히 지난 2월에는 미야기 현 제2의 도시인 이시노마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한 달 넘게 사건 현장 주변에 머물면서 연일 사회면을 대대적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당시 사건은 18세 소년이 동갑내기 여자 친구와의 교제를 반대한 여자 친구의 언니와 언니 친구 등 3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일본 열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참의원 선거 취재로 동분서주하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취재 경험을 쌓고 있다.  

안 기자는 폭주하는 업무 속에서도 ‘다문화사회’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농촌 지역인 센다이는 한국처럼 농촌 총각의 국제결혼에 따른 인종간 갈등과 가족 해체, 사기결혼 문제 등이 심각하다. 특히 한국에서 온 신부들이 결혼 후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지역 변호사들이 신고전화를 개설하는 등 한국인으로서 난감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사건사고들을 다루면서 일본인과 외국인 모두를 위해 필요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다.

사 3년차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성장하고 있는 안기자의 이야기는 국내 언론계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도 언론사마다 ‘성숙한 다문화 사회 정착’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원채용 등을 통해 이를 직접 실천하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장애인 고용은 어떤가. 지면에서는‘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를 강조하지만, 앞장서서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는 별로 없다. ‘열린 채용’과 ‘블라인드 인터뷰’가 대세인 요즘도 실제로는 출신 학교, 성별 등을 따지지 않는 곳이 드물다. <아사히신문>의 사례에서 배울 것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안기자는 장차 외국인 및 노동문제 전문기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뜨겁고 민주당과 자민당도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이런 문제들을 포함, 일본에서 외국인과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기 위한 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심층 보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가 지방 근무를 마치고 도쿄 본사로 복귀할 즈음엔 갈고 닦은 솜씨를 본격적으로 보여줄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안인주 기자가 면접 당시 인용한 아사히신문의 사설을 붙입니다. 다문화시대를 맞은 우리사회에도 생각해볼 거리를 주는 내용입니다. 

<아사히신문 사설>

      「단일민족신화」를 넘어 
 
       외국인 아이들에게 일본어 등의 교육지원을
       다민족이 ’이웃’으로 공생하는 사회를 만든다
 
 급속히 진행되어 가는 고령화(高齡化)와 인구 감소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 사설은 시리즈로서 소자화(少子化:저출산) 대책의 중요성과 빈곤에 고민하는 젊은층의 자립 지원을 제언해 왔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일본 내 외국인 등록자는 2006년 말 기준으로 최고 208만 명을 기록해, 1990년대와 비교할 경우 2배로 증가했다. 그 중에서도 역시 재일 한국인이 60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급증 추세인 중국인은 56만 명, 일본계 브라질인은 31만 명, 필리핀인은 19만 명으로 이들은 일본에서 ‘뉴커머(new-comer)’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도심의 공장지대에서 농어촌까지 외국인이 일하는 장소는 일본 전국에 퍼져 있다. 결혼도 2006년에는 16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을 했고, 4만5천 쌍 가까운 국제결혼 커플이 탄생했다. 외국인이 바로 옆에서 생활하는 사회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노동인구는 1990년대 말부터 감소하게 되었다. 일하는 여성과 고령자가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2020년대에는 노동력 부족이 더욱 심각해진다. 일본 정부는 그간의 방침인‘단순 노동자와 이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수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을 열고 외국인을 받아들여 개성과 다양성이 충만한 공생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낫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하고 세금과 사회 보험료를 내면서 농업과 복지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일본의 활력도 그만큼 더하게 된다.
                                                      
 이런 미래 지도를 그려두고 가까운 곳에 눈을 돌리면 외국인을 받아들일 태세가 아직까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의외로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뉴커머들은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일할 수밖에 없고 일본어를 배울 여유가 없다. 일본 사회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리수거하는 방법 등의 사회생활 관습을 제대로 못 지키고, 지역과 직장에서 마찰도 발생한다.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회 균열이 팽창되어질 뿐이다.

 뉴커머들만 모여 독립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들을 지역사회로 자연스럽게 흡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와 비영리단체(NPO)와 연계하여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지원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사는 재일 한국인과는 달리 많은 뉴커머의 아이들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고등학교 진학률이 낮다. 또한 학교에 다니는 대신 비행 청소년이 되는 예도 적지 않다.

 도쿄에서도 외국인 비율이 높은 신주쿠에서 2007년 6월 구(区)와 자원봉사(프론티어) 단체가 공동 주최한 일본어 교실 ‘모두의 집 어린이클럽 신주쿠’가 시작됐다. 이곳에서는 중국과 한국, 태국에서 온 33명의 초중학생들이 방과 후에 보습(補習)을 하고 있다. 번화가의 가까운 한 아동관을 들여다보면 외국인 어린이들이 중고학년 자원봉사자와 일 대 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고바야시 후코 대표는 “일본어를 조금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공립 초중학교에 재학하는 약 7만 명의 외국인 가운데 2만2천 명에게 일본어 지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문부과학성이 인정하는 일본어 교사의 수가 부족해 지역사회(시읍면)가 이를 독자적으로 부담하고 있다. 수업 지도도 회화가 중심이어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원인이 되고 있다.

 학부모에 대한 교육지원 또한 중요하다. 일본말을 구사할 수 없으면 이웃들과의 교류도, 자녀의 진학 상담도 할 수 없다. 노동에 있어서도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의료, 연금, 고용보험에 가입시키고 정사원으로의 기회를 넓혀, 일하는 환경을 안정시켜야 한다. 외국인을 많이 고용하는 기업은 그렇게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의 연수생, 기능실습생 제도에는 정말 문제가 많다. 고용주가 지불하는 급여 체계에 핑하네(돈을 뜯어가는 것)와 잔업수당 미지급 등의 부정이 횡행하고 있으며, 연수생에게는 최저임금도 적용되고 있지 않다. 인권을 침해하는 제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핵심은 외국인을 단순히 ‘싼 노동력’이 아닌, 인격을 가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에 있어서 고도의 기능과 지혜를 가진 인재획득 전쟁이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능력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유능한 인재에게는 경영과 연구를 맡겨 세계의 인재를 불러들임으로써 일본이 ‘황금의 나라’가 되는 것을 지향해 나가자.
                                                       
 외국인과의 공생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문화와 습관, 세심한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단어를 이해하고 말하고 교두보가 될 인재를 늘려갔으면 한다. 정주(定住)부터 영주(永住), 국적취득 절차를 수월하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영주 외국인의 납세로 사회를 지탱해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방 참정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난민으로의 문호(門戸)도,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넓혀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단일민족 신화’를 기본으로 전후(戦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일찍이 도래인(渡来人)과 북해도의 아이누 민족 등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다민족 사회’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러한 각오로 신화의 벽을 넘어서야, 21세기에도 일본의 활력과 매력을 지키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아사히신문 2008년3월10일자 사설/번역 박세정 전 숙명여대 광고홍보학과 겸임교수)


 


 

김정섭 /성신여대 방송영상저널리즘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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