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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공론화 이전으로 돌아가선 안된다

포항 지진으로 많은 분들이 고통받고 있다. 직접 재난을 겪는 포항 시민들만 못하겠지만, 언론과 매체를 통해 재난 현장을 보고 들은 일반 시민들의 마음도 두렵고 슬프다. 시민들은 또한 염려한다. 원자력발전소는 안전한가?

 

지진이 나자마자 한국수력원자력은 진앙에서 가장 가까운 월성 원전을 포함해서 전국의 모든 원전이 안전하게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발전소 주변에 설치한 지진계측기를 분석해서 추후 보고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다음날 노후한 월성1호기의 조기 폐쇄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냈다. 그러나 시민들의 염려는 계속된다. 원자력발전소는 정말 안전한가?

 

규모 5.4지진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7일 오전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 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이재민이 짐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의 염려를 부채질하듯 정치권에서 원전정책에 대한 공방전이 한창이다. ‘포항 지진은 탈원전을 추진하라는 마지막 신호’라는 묵시록적인 주장이 나왔다. ‘포항 지진보다 몇 배가 큰 지진이 발생해도 문제없다’는 호언장담도 있다. 정치권 장단에 맞춰 언론도 춤을 춘다. 일부 언론은 신고리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재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신고리 공론조사를 거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데 두려움만큼 안심이 위험하고, 협소한 이익 추구만큼 과도한 이념화를 피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나. 에너지 정책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인 시민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판단하면 된다는 것 아니었나. 시민들은 배워 나가는데, 정치권과 언론은 제자리에 있다.

 

시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판단 요인은 원전의 안전성이었다. 이미 공개된 공론조사 보고서에 나와 있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전기요금이나 환경 문제, 그리고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 등 다른 요인보다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 문제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종합토론회 당시 참여한 시민들이 보여준 집중력과 열의가 대단했다. 시민들은 집요하게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특성과 안전성에 대해 질문했고, 전문가들은 시뮬레이션 실험 결과와 국제 건설기준 자료를 제시하면서 응답했다. 원전이 지진으로부터 안전한가라는 사안은 자료집, 전문가 토론, 분임토의에서 빠뜨리지 않고 다룬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시민들이 원자력발전의 환경성, 경제성, 안정성, 그리고 안전성을 모두 고려해서 판단했을 때,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공론조사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공론조사 참여자들은 2박3일간 종합토론회에 참석하기 전에는 ‘신고리 5·6호기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이라는 주장에 48%가 공감을 표했지만, 전문가 토론과 분임토의를 마친 후에는 같은 주장에 57%가 공감했다. 또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반대한다고 응답한 시민들 중에서 ‘후쿠시마와 같은 원전사고와 같은 위험이 있어서’라는 이유를 선택한 이들은 1차 조사에서 34%에 달했지만, 숙의를 거친 후 비율은 26%로 감소했다. 공론조사에서 원자력발전 반대편 전문가는 적어도 원전의 위험성을 이유로 시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숙의민주주의란 공공정책을 결정할 때,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공론조사는 이를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결론이 자기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꺼이 그 결론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요컨대, 공정한 절차와 합리적 토론이 민주적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번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물론 그 과정을 관찰했던 이들도 이 요점을 어렵지 않게 습득했다. 다만 정쟁에 몰두한 정치인들과 정파성에 매몰된 언론인만이 예외처럼 보인다.

 

포항 지진을 계기로 얼마든지 원전정책에 대해 재론할 수 있다. 민주적 결정이란 재론과 반론에 열려 있는 결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론이든 재조사든 새로 시작하려면 그 이유 또한 합리적이어야 한다.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수집해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새 증거와 이유가 시민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먼저 입증해야 한다.

 

정치인들이야 포기한다고 해도(신고리 5·6호기 문제도 국회가 해결할 수 없었기에 공론조사를 도입했다), 언론은 다음 두 가지만이라도 노력했으면 한다. 첫째, 에너지 정책에 대한 논의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보도해야 한다.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일수록 이렇게 보도해야 한다. 즉 기존에 제시한 근거와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서, 새로운 주장을 평가하는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처음부터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방식으로 보도하는지 나는 다만 놀랄 뿐이다.

 

둘째, 누가 감성적으로 선동하는지, 누가 협소한 이해관계의 앞잡이인지 고발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이미 반박당한 논지를 되풀이하는지 폭로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에너지 정책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없었고 공론조사 결과도 필요 없다는 듯 떠드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전략적이고 무례한 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언론을 보면서 나는 의심한다. 민주적 정당성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목소리만 크면 된다고 믿는 것은 아닌지.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