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라는 말은 그렇게 기이하고 공격적인 말이 아니었다.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말도, 사실 제야의 종소리가 들릴 때 두 손 모아 비는 기도문 같은, 미래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지 현재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이 말들이 주홍글씨처럼 여겨지고 누군가를 단죄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한 ‘사람’이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읽었다고 말했는데 이 말 때문에 그 ‘사람’의 사진이 불타는 일도 발생했다. ‘트리 오브 세이비어’라는 게임의 원화가는, 1987년부터 활동해 온 시민단체 한국여성민우회를 SNS에서 팔우한다는 이유로 직업 적합성을 의심받고, 사측에 의해 공식적으로 실명이 공표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모로 보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연속되고 있으며, 이 모든 일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일부 남성들이, 꾸준히, 자신의 세계로부터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지워내고 싶어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게임업계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나딕게임즈의 ‘클로저스’의 경우 원화가가 SNS에 페미니즘 관련 메시지를 쓰거나 리트윗한 것을 문제 삼아 “우리 사회의 긍정적 가치를 저해하는 모든 행동에 반대”한다면서 해당 원화가의 사과를 받았다. 이처럼 게임업계에서 생산자 여성의 위치는 남성 소비자의 요구라는 명목하에 점차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게임 영역이 주로 남성 소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생산자들이 남성 소비자의 목소리를 우선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7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낸 통계 자료들을 보면 여성의 게임 이용률이 결코 낮지 않다. 여성의 게임 이용률은 65.5%로 남성의 75.0%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온라인 게임의 이용률은 여성(26.8%)이 남성(50.4%)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지만, 모바일 게임 이용률은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결국, 온라인 게임 이용자의 경우에만 성비가 기울어져 있는 모양새인데, 그렇다면 오히려 이러한 상황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닌가? 산업이라면, 모바일 게임보다 온라인 게임에서 여성 이용자가 현저히 적은 이유를 찾아 개선하고 소비층을 늘리려 시도하는게 합리적이지는 않은가? 게임 문화는 남성의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인식이, 이제까지 수많은 여성 게임 이용자를 배제해 온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아닌지 성찰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게임산업은 남성 소비자들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온라인 게임의 원화가가 ‘메갈’인 것 같다고 글을 올리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정을 하고야 만다. 이 게임을 하는 중인, 혹은 미래에 할 수도 있는 여성 이용자는 산업에 가치가 없으며, 이 산업에 여성 생산자는 필요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명백한 것은, ‘트리 오브 세이비어’ 게임 사례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 등을 팔로한다는 이유로 해당 노동자의 실명을 밝히면서까지 관련 공지를 하는 등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했다는 사실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노동자의 사상을 근거로 직업을 박탈하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위치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현재 각종 게임 이용자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면 원화가와 성우 등 여성이 담당한 역할에 대해 과거의 SNS 행적을 찾아내 신고하는 게임 이용자의 게시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에 힘입어 직원에게 압력을 가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게임업계를 게임 내부 웹진이나 다른 게임 관계자들이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근거로, 페미니즘을 해악으로 모는 현재 온라인 문화와 게임 이용자의 정서를 든다. 성차별 문화에 대해 비판해 온 여성계의 목소리를 모두 혐오로 간주하면서 이를 ‘우리 사회의 긍정적 가치를 저해하는 행동’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긍정적 가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존의 성차별이 유지되는 것, 게임에서의 여성 재현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것, 게임을 하는 여성 이용자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적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무효화시키려는 것, 결국 여성이 차별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과거가 바로 ‘긍정적 가치’였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제까지 페미니즘이 싸워온 것은, 바로 이러한 ‘남성이 보편자’라는 세계 인식이었다. 페미니즘은, 실제로는 편향적이면서도 ‘객관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남성 중심의 세계에 도전하는 행위 모두를 사회의 해악으로 모는 것, 이 위치만이 정상적인 것이며 이것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남성 중심의 세계 인식만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다른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으려는 반민주주의적 태도이다. 게임업계는 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평등과 차별 철폐라는 가치를 추구하려 하고 있는지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게임업계야말로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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