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는 안무와 특색 있는 멜로디로 유명한 걸그룹이 새 앨범을 발매합니다. 발매 몇 주 전부터 카운트다운처럼 컴백 스케줄과 활동계획이 미리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공유됩니다. 맛보기를 위한 티저 영상, 음원 발매,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공개, 쇼케이스, 주요 음악 방송 프로그램과 라디오 출연, 게릴라 콘서트 등 불과 며칠 사이 전국을 오가며 숨가쁘게 일어나는 활동들은 모두 동영상 플랫폼에 실시간으로 옮겨져 ‘조회수’와 ‘좋아요’의 횟수, 댓글의 반응이라는 성적표로 평가됩니다. 매일같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 최애 그룹의 그날 활동 내역을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확인해보는 골수팬이라면 1주일에 한 번 하던 KBS <가요톱텐>의 방송시각에 맞춰 서둘러 귀가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원시시대와 같을 터입니다. 그 시절 주말마다 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해지던 빌보드 톱20의 노래들은 신탁을 받아 온 사제와 같은 DJ를 통해 복음처럼 전해져 왔습니다.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이성 친구에게 건네기 위해 동네 ‘음악사’에 부탁하여 카세트테이프에 차곡차곡 히트곡을 녹음했던 경험은 있으신지요. 그마저의 비용도 부족해 라디오의 선곡이 연주되는 시점에 녹음 버튼을 눌러 공테이프에 하나씩 채집할 때 가장 야속했던 DJ는 전주가 흐른 후 멘트를 하거나 후주의 끝까지 들려주는 배려가 적은 분이었습니다.
LP 레코드를 사기 위해 한달간의 용돈을 모아 레코드 가게에서 신중하게 고르던 예전 중학생의 모습은 오쿠다 히데오의 자전적 에세이 <시골에서 로큰롤>에도 실감나게 담겨있습니다. 청계천 뒷골목 후미진 상가에서 몰래 팔던 흑백 표지의 해적판 음반에는 정식 발매본에는 들어있지 않은 금지곡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사는 당연히 없었기에 영어 듣기평가 시험처럼 서툰 귀로 들은 후 말도 안되는 철자로 연습장 위에 재창조되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무슨 공부냐는 부모님의 걱정을 애써 무시하며 함께한 그 음율은 살고 있는 작은 동네를 넘어 커다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와 다름없었지만 그 통로의 방향이 뮤지션의 세상에서 내 방으로의 단방향이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발신하거나 상호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절이었지요.
“신한류의 확산은 동영상 플랫폼의 확장에 기인한다”는 명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전달되는 매질의 확장을 넘어 실연자와 청취자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플랫폼에 참여하는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덕후들로 인해 조금씩 옅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연 현장에서 채록된 4K 화질의 팬캠 영상은 멋지게 다듬어져 공연의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생생하게 전달해 줍니다. 그룹 내 멤버별로 한 명씩 집중하여 찍어낸 자료는 세분화된 팬의 기호를 충족하고 멤버별 숨겨진 재능과 열정을 발견해내어 깜짝 스타를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늘 누군가 응원한다는 관심을 영상 속 주인공에게 전달하여 무리 속에 있더라도 항상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해 주는 보너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주보다 사람의 목소리만 두드러지게 듣도록 해주는 MR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기술은 기본기가 갖춰진 가수의 선발을 기획사에 요구합니다. 안무 연습을 돕기 위한 거울모드 영상이 나오자마자 하루도 안되어 게시된 다른 나라 팬의 커버 댄스 영상은 뮤지션의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실감케 하고 게시자의 빠른 습득력과 센스를 다시 그의 명성으로 되돌려줍니다. 다른 의상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연 영상들의 마술 같은 교차편집본은 마치 중국의 변검을 보는 것 같아 재능있는 아마추어 팬의 실력과 애정의 깊이를 느끼게 해 줍니다. 외국의 팬들이 뮤직비디오나 공연을 보고 놀라는 반응을 올린 리액션 영상은 한류가 만들어낸 놀라운 영향력이 자칫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뿌듯한 감정과 자랑스러움으로 치환해 줍니다.
140년 전 미국의 천재 발명가는 소리를 저장하여 재생하는 기술을 고안하여 한정된 소수의 이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일에도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불편함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다시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파와 결합된 소리는 문자 그대로 지호지간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 ‘사운드의 민주화’를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전파 접근성의 한계와 채널당 할당되어진 시간의 유한함은 TV 방송을,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무한정의 접속이라는 동영상 플랫폼의 다양성과 맞서 이기기 힘든 싸움의 운명으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그물망같이 이어지는 세상은 만드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상호작용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수동적 청취자였던 대중을 능동적 창조자들로 만들어내어 모두 함께 주인공이 되는 ‘축제의 민주화’를 이루게 해 줍니다. 만드는 자와 즐기는 자의 구분이 사라지는 축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예전 원시 공동체의 제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축제의 크기가 한 마을에 모일 수 있는 무리를 넘어 지금 살고 있는, 그리 크진 않지만 우리 몸의 크기에 비해 결코 작지만은 않은 별의 크기로 확장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송길영 |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
'미디어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디어 세상]차별화된 기사 고민해야 (0) | 2018.05.21 |
---|---|
[기자칼럼]플랫폼과 미디어의 공존 (0) | 2018.05.15 |
[정동칼럼]방송법은 정쟁거리가 아니다 (0) | 2018.05.14 |
[사설]네이버의 ‘무늬만 아웃링크’로 문제 해결 안된다 (0) | 2018.05.10 |
[미디어 세상]드루킹 나비효과와 언론의 자기 반성 (0) | 2018.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