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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언론의 정파적 보도, 신뢰의 추락

행위의 주체를 가리고 판단해보자. 말하자면 어느 정권 당시 국가 정보기관이 댓글로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기관이 수사에 개입해서 수사의 방향이나 수사의 성격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비밀자금(특수활동비)을 권부의 핵심 청와대에 상납했다는 의혹이 있다. 청와대는 그 돈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선거에 대비 또는 개입하려 했다. 정보기관의 정보관(I/O)이 공영 언론의 책임자인 보도국장에게 금전을 제공하면서 특정 기사를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는 의혹도 있다. 이 기관은 더 나아가 특정 성향의 단체들이나 매체들을 정기적으로 지원했고 기업체에 압력을 넣어 지원하도록 했다는 의혹이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이런 의혹들이 드러났다면 수사기관이 수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수사를 요구할 것이고 혹시라도 수사에 미온적이면 그 수사기관을 비판할 것이다.

 

특정 정권 아래서 정보기관이 이런 일들을 벌였다면 야당은 국정조사를 하자, 청문회를 하자며 국회를 들었다 놨다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이런 일들을 덮자고 한다. 그들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혹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어두웠던 과거를 정리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행위를 정치 보복이라고 비난한다. 시민들도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순간 비판하고 수사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태도를 바꿔 ‘그럴 수도 있지’, ‘굳이 그걸 다시 밝혀낼 필요가 있나’ 한다는 점이다. 정치 대신 정략적 행동만을 앞세우던 정치꾼들로 인해 우리 사회 일각은 민주주의 상식을 상실했고, 지나치게 정파적으로 변해 버렸다. 2016 촛불혁명은 상식을 복원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자는 시민의 목소리였다. 국정농단한 대통령조차 옹호하며 국가의 상징 태극기를 훼손하는 수준을 극복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판과 감시 기능으로 심판자 구실을 해야 할 언론이 경기의 선수로 나서 뛴다는 점이다. 법과 상식의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불법, 편법 행위를 정파적 관점에서 유불리를 따져 말을 바꿔가며 옹호한다는 점이다. 적폐를 청산하려는 시도를 정파들 간의 정치 공방으로 전락시켜버리거나 무시해버린다. 그럼으로써 언론도 스스로 정치적 행동대원으로 전락해버렸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이 밝혀졌다면 최근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 시절 친권력 단체나 매체를 지원했다는 소위 ‘화이트리스트’ 의혹이 제기됐다. 대부분의 언론이 집중 보도했다. 대북 안보 업무를 수행해야 할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는 증거이고, 사실 댓글 사건보다 더 중대한 정치개입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언련 모니터 결과에 따르면 동아와 중앙은 당시 한 건의 보도도 하지 않았다. 이 신문들의 의제 순위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까.

 

국정원이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정기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정원의 업무상 용처를 밝힐 수 없는 사업 예산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청와대의 비밀 업무 지원 예산은 아니지 않은가. 청와대에도 자체 특수활동비가 있다고 한다. 단지 더 비밀스러운 작업에 쓸 자금이 필요했나 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특수활동비 제공의 부당성, 사용 용도 등 진상, 특수활동비의 비밀스러운 사용의 문제점에 주목하기보다는 ‘과거 정권 시절에도 있었고 뇌물죄로 처벌한다면 어느 정권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는 정치권이나 국정원의 견해를 그대로 전했다. 소위 물타기의 대표적 사례다. 언론이 할 짓인가, 취재원의 발언 속에 숨으면 면책되는 것일까.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공영방송 정상화의 일환인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에 자신들의 적폐를 현 정권이 따라 하면 안 되지 않느냐는 식의 고육지책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강제로, 불법으로 진행된 과거의 사례와 구성원들의 정당한 파업 결과를 등치시키는 물타기 주장이었다. 그런데 MBN에 출연한 차명진 전 새누리당 의원은 이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정치사의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출연자를 출연시킨 언론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 이런 언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수용자의 외면 속에 저

널리즘 기능을 하는 언론은 점점 쇠락해가고 오락적인 매체만이 살아남는 경향이 더욱 심화될 뿐이다. 언론은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 흔히 말하는 신문방송의 위기는 사실 신뢰를 스스로 걷어찬 언론의 행태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문제는 왜곡하는 일부 언론만 쇠락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태에 질린 시민들은 언론 일반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언론들이 자기 혁신의 일환으로 언론 간 상호 비평을 한 적이 있다. 이런 방법이든 어떤 방법이든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김서중 |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