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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민비평

세계 최대 조세회피처는 한국이다

오래 번성한 강대국은 상류층이 납세와 병역 의무를 다한 나라들이었다.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베네치아공화국도 초기에 그런 전통을 만들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고대에는 개념조차 없던 상속세를 신설하고 자신이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놓았다. 베네치아의 자산가들은 이자가 낮아서 부유세나 다름없던 국채를 스스로 매입해 ‘뻘밭’ 위 도시국가를 천년이나 지탱했다.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정반대다.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상류층일수록 병역기피자가 많은 나라, 조금만 세금을 올리려 해도 부자들의 조세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서민들의 조세저항은 바람직하진 않지만 이해는 간다. 학습효과가 워낙 강했던 탓이다. 극소수 땅부자에게 물리려 했던 종합부동산세가 유명무실해지고, 의사·변호사·목사와 자영업자들의 탈세가 횡행하는 현실을 봉급쟁이들은 지켜봤다. 한편으로 자기들의 피 같은 세금을 4대강에 처넣고,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곳에 도로를 건설하고, 초호화 청사를 짓고, 빚더미에 올라앉을 게 뻔한 국제대회를 유치하고, 댓글이나 다는 국정원 직원에게 봉급이 나가는 나라 꼴을 목격했다. 


그러니 ‘보편 증세, 보편 복지’라는 진보진영의 목소리마저 외면받는다. 봉급쟁이들에게 한 달에 1만원 남짓 소득세 더 내는 것조차 본전 생각나게 만들어놨다.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과 진보언론조차 이런 정서에 편승하는 꼴을 보여준 게 지금의 세금파동이다. 


종부세를 ‘세금폭탄’이라 했던 한나라당 등 보수 쪽의 흑색선전을 답습한 민주당은 당 지도부의 수준과 정체성을 드러냈다. 종부세는 세금부담이 터무니없이 낮은 2% 땅부자들의 부담을 좀 늘리자는 것이었다. 98%는 세금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으니 서민에게는 ‘세금폭탄’이 아니라 ‘세금폭죽’이라 부르는 게 진실에 가까웠다.


이번에 민주당과 진보언론은 애초부터 ‘보편 복지를 위해 그 정도 소득세 증액은 감수하자’고 설득하면서, 누진적인 ‘부자증세’를 강력하게 요청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박근혜 정부가 표방한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을 속속들이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세정책만큼 보수·진보 정당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은 없다. 


집권세력한테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선거를 위해 차용한 남의 공약이었고, ‘줄푸세’, 곧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는 게 변함없는 소신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제조도 안된 ‘세금폭탄’을 비난하는 바람에, 정부·여당은 소득세 부담이 늘어나는 연봉을 5500만원으로 올리는 선에서 파동을 수습해가고 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왜곡된 세제와 탈세, 조세정책 방향에서

네로 황제와 박근혜 정부의 차이점이 뭔지 모르겠다


경향신문이 어느 신문보다 앞선 12일자부터 ‘시민사회 증세론’과 ‘사회복지세 신설론’을 부각시키고 ‘중산층 세금폭탄’이 과장됐음을 본격적으로 치고나간 것은 매우 돋보이는 보도였다. 한편 13일자에 “세법개정안을 원점서 재검토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들끓는 현오석·조원동 책임론, 여당 내부서도 부글부글’식으로 보도한 것은 집권여당의 회피작전에 말려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개운치 않았다. 


박 대통령은 “서민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라며 ‘구경꾼 화법’을 구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정협의와 대통령 보고까지 마친 사안이고 모순된 공약을 내세운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큰데도 경제팀을 속죄양으로 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사정 변화를 내세워 복지공약을 폐기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앞으로 진보언론이 집중해야 할 것은, 한국 사회의 존속을 위해 복지 확대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세제와 세정 개혁을 통해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세제가 얼마나 왜곡돼 있고 탈세가 폭넓게 이루어지는지 심층보도해 개혁의 동력을 살려야 한다. 


‘대기업 법인세는 지금도 높아서 올리면 안된다’는 정부와 보수언론의 논리만 하더라도 얼마나 허약한가? 대기업은 각종 감면조처로 실효세율이 최저세율 한도인 16%에 가깝다. 지난해 순이익 11조5000억원을 낸 삼성전자의 실효세율은 16.3%에 그쳐 중견기업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다. 미국은 법인세 최고세율이 35%이고 실효세율이 26%나 된다. 우리 기업의 사회보장기여금도 매우 적다. 


가장 심각한 것은 상속세 탈루다. 삼성그룹의 자산은 300조원 규모로 평가되지만, 이건희 회장이 176억원의 상속세를 내고, 이재용 부회장은 16억원의 증여세만 낸 채 경영권을 상속받은 상태다. 지금까지 상속세 최대금액은 신세계 3500억원을 필두로 교보생명, 대한전선, 태광산업 등이 1000억원 이상 냈는데, 기업 규모에 견주어 삼성의 상속증여세액을 납득하는 국민이 있을까? 헐값 주식 양도, 전환사채 악용, 일감 몰아주기 등이 삼성이 개발한 ‘절세’ 수법이었다. 일감 몰아주기 중과세 방침도 이번 세제개편에서 후퇴해 탈세를 합법화했다. 


최근 뉴스타파가 버진아일랜드를 통해 재산을 은닉한 한국인 명단을 밝혔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 차이트는 미국·영국·룩셈부르크·스위스·독일 등이 조세회피의 허브임을 밝히는 심층보도를 했다. 그러나 나는 세계 최대 조세회피처가 야자수 아름답게 늘어선 섬나라와 선진국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들은 해외의 검은돈을 불려주는 역할은 하지만 자국 기업의 탈세에 대해서는 엄벌한다. 


[장도리]2013년 8월20일 (출처: 경향DB)


재정위기에 처한 로마 황제 네로는 도시에서 팔리는 모든 음식물에 세금을 물리고, 짐꾼에게 하루 벌이의 8분의 1, 매춘부에게 한 번 관계를 가질 때 받는 금액만큼을 하루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세법개정안을 마련했다. 하루 한 번밖에 관계를 갖지 못한 ‘경쟁력 없는’ 매춘부에게는 100% 근로소득세율이 적용된 셈이다. 라티푼디움 소유주 등 대자산가들은 손대지 못하고 서민 부담이 큰 간접세와 근로소득세를 올린 것이다. 조세정책의 방향에서 네로와 박근혜 정부의 차이점이 뭔지 모르겠다.


이봉수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hibongsoo@hotmail.com